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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리뷰: 박금산의 단편소설. '아내를 창밖으로 던져버린 사내'

*외재적 관점 리뷰
 
작가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비실대거나 과격해 보이고 외부와 단절된 많은 수의 한국 작품 속 인물들에 대해 나는 일단은 거부감을 느낀다. 이는 소설 속 남편아내를 바라보는 눈빛,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특히 90년대 경제위기 이후, 지나치게 많은 창작자와 작품들 사이에 공유되고 반복되어져 온 전형이라는 점에서, 나의 거부감은 어쩌면 단지 그 진부함과 관련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새로운 형식과 관점을 만들어 낼 때 그 거부감은 조금은 덜 해지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품들을 대하고 나면 내 몸은 평소보다는 많은 양의 산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
 




'아내를 창밖으로 던져버린 사내' 삽화. 울산매일
 
   문학뿐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이나 영화 등에서 느껴지는 이와 비슷한 많은 수의 화자나 인물들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것을 느낀다. 그 인물들을 계속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남편처럼, 망막 밖과 안쪽에서 서로 다른 것이 보였으면 한다.
   물론 나에게 그것은 강한 대비가 있는 경계의 다른 면으로 입을 내밀고, 깊은 숨을 들이키는 것으로 이어지겠지만, ‘남편에게는 숨이 더 빨려 나가는 일이 되고 있다. 그렇게 남편체내의 숨은 부족하고 더 부족해지게 된다. 이는 예컨대, 김광석이 서른 즈음에에서 청춘의 고뇌를 거듭 이야기 해나가며 누적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가 박금산과 가수는 그 점에서 분명 성취를 이룬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것, 숨 쉬기 힘겨움,은 많은 독자와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고 위로를 준다. 하지만 나의 경우, 90년대부터 그 힘겨움을 역시 공유해오고 위로 받아 온 나의 경우, 이제는 그 오랫동안 참아야 하는 숨쉬기 형식에 몸, 그리고 마음이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를 둘러싼 대다수의 작품이 그렇다는 것에서 더 심리적 압박을 느끼곤 한다.
 
   구체적으로,
   그 작품들 속 인물들 대부분의 삶은 주체적이기 보다는 피상적이다. 그래서 거기서는 생명과, 그것의 힘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인물 외면으로 시야가 옮겨질수록 뚜렷하게 보이는데, 다른 인물과 힘과 힘, 즉 생명력과 생명력으로 부딪히지 모습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반면, 그 인물 내면에서는 누적되고 누적됨을 통해 깊은 차단과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사실 이 자체만으로도 역설적이게, 작품은 관계’ ‘생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작품과 이야기에 따라서는 삶에 대한 어떠한 새로운 관점으로 이어지거나, 또는 어떠한 인간적 재생 의지와 끝내 연결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단절 된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재생의 의지는,
인간들 간의 생명력 있는 부딪힘,
, 오해와 갈등, 좌절과 두려움, 그럼에도 연이어 다시 부딪혀보기를 택하는 용기, 그로부터 막다르게 되는 후회 또는 용서, 혹은 상대에 대한 인내와 스스로에 대한 존중 등에 비하면
나의 내면으로 넘어왔을 때 나마저 크게 움직이지는 않음을 발견한다.
그랬던 적이 없지는 않지만, 그 토대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이제 무언가 부족하다고, 언제부턴가 내 마음이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나는, 날카롭고 고농도의 내면을 가진 단절된 인물보다는, 그것이 상대와 부딪힘으로 인해 닳고 닳아 투박하며 어쩔 수 없이’ 껍질이 부드럽고 아직 빈 공간이 곳곳에 눈에 띄는 그런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에서 더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레이먼드 카버 소설 속의 인물들, 칸 영화제 작품들 속 인물들, 폴 메카트니나 존 레논이 부르는 곡 속의 화자들을 대할 때 그러하다. 




'아내를 창밖으로 던져버린 사내' 삽화. 울산매일
 
   그래서 나는,
이와 같은 인물을 담은 작가를(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남편'일테다) 
창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충동,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어느 정도는 느낀다.
  그것은, 소설 속 남편이 아내에게 그러한 것처럼, 대단한 이유때문은 아닐 것이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단지 숨을 제대로 쉬고 싶고 밥을 제대로 먹고 싶은,
그 정도의 것일 거다.
 
  그럼에도 이러한 인물들을 다루는 많은 수의 한국의 작가들(그리고 가수, 영화감독들)과 작품을 충동에 휩싸인 채 그대로 창밖으로 내던져버릴 수는 없다고, 그래서는 결국 안 된다고 느낀다. 이와 같은 작가들은, 그들이 담아내는 인물들이 우리 주변에 만연하다는 것을 반증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이와 같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그들은 어쩌면 마지막 방어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남편이 아내에 대해 놓친 점들, 어느 순간부터 망각하고 외면했던 점들을, 현실의 내가 단순히 진부와 충동에 내맡겨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 작품이 나에게 남기는 가장 큰 무엇이 바로 이러한 재고再考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단지 거부하고 혹은 제거하려 한다면,
남편이 아내를 창밖으로 던지고 나서 그랬듯,
우리는 결국, ‘미혜’*를 정면에서 홀로 마주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6.06.19.
김홍성
iamhongsungkim.blogspot.com
 
 
 
*작품 자체만을 갖고 살펴보는 내재적 관점에서의 리뷰는 추후 올리고자 한다.
*작품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는 사이트. 및 이미지 출처
이 작품은 제24회 오영수문학상 수삭장으로서 울산매일에서 전문을 볼 수 있다.
  
*‘미혜’, 혹은 소설 속 가족들 입장에서의 간단한 줄거리
미혜는 남편과 아내의 딸로, 레프팅에 갔다가 물속에 빠진다.
부부는 사체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때는 그나마 희망을 걸어보지만,
결국 미혜는 죽어서 그들에게 돌아온다.
한편 아내는 아프리카에 잠시 다녀오고, 그 뒤로 겪던 풍토병을 이겨내는 동안은
재활 의지를 분명히 하며 힘내어 생활하지만, 그 병이 다 낫고 부터는
더 큰 병이 그녀에게 찾아온다. ‘미혜에 대한 생각들이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허약해져 간다.
남편은 어떻게든 그녀를 도와 재생시키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삶을 숨막히게 만든다. 밥 짓는 냄새에 만도 민감해진 아내라서,
어느날은 몰래 다 지은 밥을 앞에 두고도, 아내가 현관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채 숟가락도 대지 못하고 먹는 것을 포기한다. 그때 남편의 눈에선 눈물마저 흐르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날 그동안 쌓인 것과 충동에 의해 남편은 아내를 창밖으로 내던진다.
이것은 그녀가 원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하려는 말은 듣지도 않은 채,
그녀를 던져버린다.
그러고 나자 남편 앞엔 아내’가 떠난 자리로  미혜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힘겨움을 겪는 남편은 아내가 먹던 우울증 약을 서랍에서 찾아 먹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도 창밖으로 뛰어내리고자 한다.
아내가 그동안 미혜를 떠안고 버텨주고 있었음을, 그녀가 최후의 방어벽이었음을 남편은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함께 보면 좋을 작품들
 소설.
한강 단편소설, '내 여자의 열매' 1997
아내의 몸에 녹색 멍이 들어있다. 아프지는 않다고 말한다. 병원에 가보아도 의사는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멍은 점점 늘어가고 아내는 햇빛 쬐는 것을 점점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남편이 일주일간 해외 출장을 다녀왔을 때, 그녀는 베란다에서 나무로 변해가고 있었다. 남편은 물을 달라 말하는 그녀에게 물을 주고, 화분에 심어주고, 흙을 갈아준다. 아내는 점점 나무가 되어가고 결국 완전히 나무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모든 잎마저 떨어뜨리고 마치 죽어버린 것처럼 된 그녀는 입이었던 자리에서 열매를 쏟아낸다. 남편은 그 열매를 맛보고, 화분에 심는다. 봄이 오면 그녀가 살아날까 생각한다.    출처:http://blog.munjang.or.kr/lib/blog_print.asp?no=77134&id=orumi
 
영화.
사베리오 코스탄즈 감독, '헝그리 하트'.Hungry Hearts. 2014
뉴욕의 한 차이나 레스토랑,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가는 좁디 좁은 화장실.
꼼짝없이 함께 갇혀버린 미국 남자 주드와 이탈리아 여자 미나는
강렬한 첫만남 이후 사랑에 빠진다.
뉴욕의 아파트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한 주드와 미나는 곧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서로 다른 사랑 방식으로 단 하나뿐인 아이를 잃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2476 
 
 

2016-06-15

리뷰: 박기범의 동화 '문제아'


 
나는 문제아다. 선생님이 문제아라니까 나는 문제아다.
그러니까 내가 더 문제아가 되어가는 것 같다.


문제아의 도입부에서 주인공 창수는 말한다.
이 동화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의 핵심은 결국 여기에 모두 담겨있다.
 
창수를 문제아로 만들어 버린 폭력사건*이 벌어진 뒤, 교사로부터 받는 반응이 창수를 더욱더 그렇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궁지에 몰린 듯한 창수는 봉수형을 떠올린다.
 
이미 그렇게 취급을 받으니까, 나한테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문제아로 취급하지 않고 대했다면, 나는 달랐을 거다.
봉수 형처럼 말이다.
...
나는 야단을 맞아도 봉수형이 좋았다. 나를 정말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야단을 쳤기 때문이다.
 
창수가 진정 원하는 것은, 교사들이 판단하기에 앞서 우선 자신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는 것이다.
오직, 그것이다.
 
   교사들의 최소한의 배려와 이해 속에서라면 창수는 다른 아이들처럼 공평한 입장에서 처우 받을 것이고, 억울함과 두려움의 감정들도 점차적으로 사그러들 수 있다. 그 감정들 안에는 타인에 대한 불신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놔두게 된다면 창수는 정말 문제아이자, 앞으로 문제어른이 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을 막는 일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큰 예산이나 복잡한 절차에 대한 고민이 우선 고려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동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한 인간에게 문제가 셍겨날 때에는, 그 개인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한 인간에게서 문제를 걷어내는 일은, 언제나, 그들 각자의 노력과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노력이 함께할 때 가능할 것이다.
 
 
*창수를 문제아로 만들어 버린 폭력사건
 
나중에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솔직히 내가 봐도 그건 너무 끔찍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걸로 사람을 때릴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을 거다.
나는 정신없이 얻어맞고 있었고, 그 애는 더 이상 그만 때리려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너무 아팠고, 그리고 너무 억울했다.
나는 더 이상 맞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맞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즉 창수의 정당방위라고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너무 과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따라, 아마도 창수에 대한 독자들의 입장이 갈리는 듯하다. 나의 경우는, 5학년 때부터 줄곧 문제가 있는 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내오던 창수가 6학년 새학기 초반에 일어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간의 억압되어 있던 것들이 이와 같은 폭력으로 표출됐다고 본다. ,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더 정확히 말하면 창수에 대한 교사들의 진실된 관심이 일찍부터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일이라고 본다.
 
지금 나는 6학년이다. 속으로 나는 6학년이 되기를 기다렸다. 새 선생님을 만나고,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면 뭔가 다를 거라고 기대했다. 예전처럼 보통 아이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바람 역시 깨져버렸다.
 
나의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어느 블로거의 글을 우연히 발견했다.
여기에 붙여둔다.
 
 
2013
홍성
iamhongsungkim.blogsp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