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제아다. 선생님이 문제아라니까 나는 문제아다.
그러니까 내가 더 문제아가 되어가는 것 같다.
‘문제아’ 의 도입부에서 주인공 창수는 말한다.
이 동화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의 핵심은 결국 여기에 모두 담겨있다.
창수를 문제아로 만들어 버린 폭력사건*이 벌어진 뒤, 교사로부터 받는 반응이 창수를 더욱더 그렇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궁지에 몰린 듯한 창수는 봉수형을 떠올린다.
이미 그렇게 취급을 받으니까, 나한테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문제아로 취급하지 않고 대했다면, 나는 달랐을 거다.
봉수 형처럼 말이다.
...
나는 야단을 맞아도 봉수형이 좋았다. 나를 정말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야단을 쳤기 때문이다.
창수가 진정 원하는 것은, 교사들이 판단하기에 앞서 우선 자신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는 것이다.
오직, 그것이다.
교사들의 최소한의 배려와 이해 속에서라면 창수는 다른 아이들처럼 공평한 입장에서 처우 받을 것이고, 억울함과 두려움의 감정들도 점차적으로 사그러들 수 있다. 그 감정들 안에는 타인에 대한 불신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놔두게 된다면 창수는 정말 ‘문제아’이자, 앞으로 ‘문제어른’이 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을 막는 일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큰 예산이나 복잡한 절차에 대한 고민이 우선 고려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동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한 인간에게 ‘문제’가 셍겨날 때에는, 그 개인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한 인간에게서 ‘문제’를 걷어내는 일은, 언제나, 그들 각자의 노력과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노력이 함께할 때 가능할 것이다.
*창수를 문제아로 만들어 버린 폭력사건
나중에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솔직히 내가 봐도 그건 너무 끔찍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걸로 사람을 때릴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을 거다.
나는 정신없이 얻어맞고 있었고, 그 애는 더 이상 그만 때리려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너무 아팠고, 그리고 너무 억울했다.
나는 더 이상 맞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맞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즉 창수의 정당방위라고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너무 과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따라, 아마도 창수에 대한 독자들의 입장이 갈리는 듯하다. 나의 경우는, 5학년 때부터 줄곧 문제가 있는 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내오던 창수가 6학년 새학기 초반에 일어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간의 억압되어 있던 것들이 이와 같은 폭력으로 표출됐다고 본다. 즉,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더 정확히 말하면 창수에 대한 교사들의 진실된 관심이 일찍부터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일이라고 본다.
지금 나는 6학년이다. 속으로 나는 6학년이 되기를 기다렸다. 새 선생님을 만나고,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면 뭔가 다를 거라고 기대했다. 예전처럼 보통 아이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바람 역시 깨져버렸다.
나의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어느 블로거의 글을 우연히 발견했다.
여기에 붙여둔다.
2013
홍성
iamhongsungkim.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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