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17

Quote: 60

내가 말하였다고 해서 모두 믿지는 말라.
너희들 스스로 경험하고 검증한 다음, 믿으라.

- 석가모니 부처

 45년간 가르쳐 온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

music: 김현식, 김광석, 유재하 (Original. / Cover.)



'내사랑 내곁에' - 김현식, cover 임정희

'사랑했지만' - 김광석, cover 소냐

'사랑하기 때문에' - 유재하, cover 린


*인물 소개

김현식(金賢植, 1958년 1월 7일 ~ 1990년 11월 1일)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블루스, 발라드, 소울, 팝, 펑키, 트로트 등 그가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스타일의 음악이 담겨 있는 2집 앨범에서 <사랑했어요>라는 곡이 크게 히트하며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밴드의 필요성을 느꼈던 그는 1985년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였다. 1986년 12월에 발표된 3집 앨범은 퓨전재즈식 연주와 블루스풍 보컬이 세련되게 믹스된 앨범으로, 명곡 <비처럼 음악처럼>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적 견해차로 3집 발표 후 밴드는 해체되었다.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은 그는 1987년 11월 다시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된다. 1988년 2월 삭발을 한 채 오른 재기 콘서트 무대에서 용기를 얻고, 그해 9월 <언제나 그대 내 곁에> 등이 실린 4집 앨범을 발표하며 부활하였다. 4집에는 어둡고 우울한, 짙은 외로움이 배어 있는 팝발라드 곡들이 실려 있다.
당시 그는 재기를 위해 음악에 매달리는 한편 술로 외로움을 달랬다. 1989년 영화앨범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녹음할 때부터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고, 1990년 <넋두리> 등이 실린 자전적 앨범인 5집을 발표할 즈음에는 의사가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죽는다’고 경고할 정도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최악의 몸 상태에서 녹음하던 6집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1990년 11월, 33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발매된 유작 앨범 6집에 실린 또 하나의 명곡 <내사랑 내 곁에>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독보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굴곡진 삶을 살다가 요절하여 대중과 대중음악인들 모두에게 전설적 인물이 되었다.


김광석 (金光石, 1964년 1월 22일 ~ 1996년 1월 6일)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진솔한 목소리로 서정적인 발라드 및 1970년대 모던포크의 맥을 잇는 포크풍 노래를 주로 불러 20~30대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82년 명지대학교 1학년 때 노래를 시작했으며, 서울지역 대학생연합 노래패인 메아리와 이곳 출신들이 주축이 된 노래운동모임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활동했다. 1987년 첫 공연 이후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탈퇴했으며 1988년 그룹 동물원에 참여해 1, 2집 음반을 냈다. 1989년에는 솔로로 독립해 1집 음반을 발표했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사랑했지만〉·〈사랑이라는 이유로〉 등이 실려 있는 2집(1991)에 이르기까지 주로 발라드 계열의 노래를 불렀다. 3집 음반에서는 포크 음악으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데 〈나의 노래〉는 이런 변화를 보여 준 대표적 노래였다. 〈일어나〉 등이 실린 4집에서는 포크 음악의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고, 이런 음악적 변화와 함께 초기의 사랑 중심의 가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변했으며, 이를 위해 읊거나 이야기하는 방식의 창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1996년 1월 6일 자살로 일생을 마쳤다. 향년 33세. 대표곡으로는 〈사랑했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곳〉, 〈서른 즈음에〉, 〈그날들〉, 〈이등병의 편지〉,〈먼지가 되어〉 등이 있다.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유재하(柳在夏, 1962년 6월 6일 ~ 1987년 11월 1일)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1987년 1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남기고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교통 사고로 사망하였다.스물 여섯해라는 짧은 삶에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겼지만 '발라드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후배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유재하를 기리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1989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혹자는 만약 유재하가 살아 있었다면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특히 발라드의 역사에 있어 큰 변화를 가져왔을 거라 말한다. 비록 한장의 유작 앨범이 우리가 접할 수있는 그의 음악 전부이지만, 그만큼 우리 한국 음악계에 전해진 그의 음악적인 역량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출처: wikipedia 외)




내사랑 내곁에

(Original by 김현식 / Cover by 임정희)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뒤에서  함께 하는데
철이 없는 욕심에  그 많은 미련에
당신이 있는건 아닌지  아니겠지요

시간은 멀어 집으로  향해가는데
약속했던 그대만은  올줄 모르고
애써 웃음 지으며  돌아오는 길은
왜그리도 낯설고  멀기만한지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곁에 있어줘
이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곳은 어디에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곁에 있어줘
이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곳은 어디에





사랑했지만

(Original by 김광석 / Cover by 소냐)





어제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 설 수 없어
지친 그대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 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 설 수 없어
지친 그대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 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Original by 유재하 / Cover by 린)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내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커다란 그대를 향해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
그 무슨 뜻이라해도  조용히 따르리오

어제는 지난 추억을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2013-08-16

Travel: 보은. 2013.8.14-15


2013.8.14 - 15


보은 시외버스 정류장

 이틀동안 충북 보은 친척집에 내려갔다 왔다.
보은은 할아버지,할머니께서 오랫동안 살아오셨던 곳으로 친가가 있는 곳이다.
여든을 넘기시고 아흔 가까이까지 장수하시다 지금은 두 분 모두 돌아가셨지만
두분이 사시던 집에는 셋째 작은아버지가 살고있고, 읍내에는 다섯째 작은아버지가,그리고 인근 수안면에는 큰딸인 큰고모께서 살고계신다.
나는 아버지가 한때 할아버지,할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짓고 살던 때에 이 곳(보은군 탄부면 사직리)에서 태어나 주로 그분들 손에 의해 길러졌다. 인천으로 올라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전까지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지으신 집에서 아버지가 태어났고 그곳에서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명절이면 이 집에 친척들이 모두들 모여 즐겁게 놀았던 기억들이 난다. 지금 돌이켜보면 시골에서 어린 시절은 참 따뜻하고 정을 많이 느낄 수 있었던 시절로 내 인성의 많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때 같다.

올해 초 아직 겨울 추위가 다 가시지 않았을 때 큰고모댁에 들렸었다.
그리고 여름에 다시 놀러오라고 하셨었는데, 개강하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내려갔다. 다음달에는 추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땐 청주 집에 차례만 잠시 지내고 올라오는 것으로 할 겸, 이 참에 보은에 꼭 갔다 오려고 했다. 그래서 큰고모댁 뿐만 아니라 작은아버지댁들에도 같이 들리기로 했다. 그런데 시골집에 계시는 작은아버지 내외가 마침 농사일이 바쁘던 하루라 그곳에는 다음에 가기로 했다.

보은 읍내

보은에 가려면 서울에서 청주로 고속버스를 타고간 다음, 청주에서는 보은까지 시외버스를 타야한다. 길이 막히지 않으면 4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보은 터미널은 어릴적부터 있던 그 자리에 줄곧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시장이 크게 놓여있는데, 오랫만에 시장을 따라 걸어가봤다. 할머니께서 내 손을 잡고나와 읍내에 나와 시장에서 면바지를 사주던 기억들도 나고, 어머니께서 공판장에 자리를 내어 과일을 팔던 기억들도 났다. 시내버스 정류장 위치나 도로 생김새들도 거의 바뀌지 않아서, 잠시 눈을 감으면 어릴 때 본 읍내풍경이 쉽게 그려졌다. 그런데 마냥 이 곳의 추억에 잠겨있을 수 만은 없었다. 

초등학교 옆 분수대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보은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6시가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읍내에 있는 홍중이네(다섯째 작은아버지 댁 막내 아들, 나의 사촌)집으로 갔다. 읍내를 둘러보며 한 10분만 걸으면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랫만에 뵙는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께 인사드렸다. 작은아버지께서는 보은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계시는데, 몇년전부터는 집안 제사를 물려받아 지내시는 등 친척들도 잘 챙겨주시는 편이다. 작은어머니께서는 가끔 건강이 안좋으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지금은 건강히 보기 좋은 모습을 하고계셔서 다행이었다. 막내 홍중이는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지난달 인천에 사는 또다른 사촌인 홍경이와 유럽 여행을 한 달간 다녀오고나서 개강전까지는 잠시 보은집에 머물고 있다. 큰딸 민정이는 병원약국에 근무하며 서울에서 일하고 있어, 지금은 작은집에 가족 셋이서 지내고 있었다. 나는 두분께 인사를 간단히 드리고, 홍중이와 함께 차를 타고 인근 수안면 큰고모댁으로 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말씀을 드리자 작은아버지 내외도 오랫만에 같이 고모댁에 인사 겸 가고자 하셨다. 그래서 넷이서 차를타고 작은집을 출발해 나와 읍내에서 고기와 과일을 사서 싣고 고모댁으로 다같이 가게됐다. 아무래도 홍중이하고둘이만 가는 것보다는 더 좋은 일이 됐다.

고모댁 가는 길


20여분 차를 몰고들어가니 고모댁에 도착했다. 저녁도 안드시고 있으면서 기다리시다가 우리가 오자 반갑게 맞아주셨다. 고모는 나 혼자 오는 줄로 알고 있으시며 저녁 밥을 준비해놓고 계셨었는데, 작은집과 함께 같이 놀러를 오니 아무래도 더 반가워 하셨다. 고모는 아버지 형제 중 가장 어른으로 고모부와 함께 두분 모두 지금 연세가 일흔이 넘으셨다. 나이가 드시면서 어쩔 수 없이 몸이 약해지는 것과 병이 드는 것을 빼면 고모나 고모부 모두 마음은 아직 젊으신 것 같았다. 


고모가 집 앞에 고추를 바구니에 담아 두고 말리고 있었다

고모부, 작은아버지 홍중이가 거실에서 저녁 준비중이다

고모와 작은아버지 내외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고모부는 보은에서 지관(선산이나 묘자리를 봐주는 일)을 하고 계시고, 고모는 조그만 밭을 일구면서 읍내 노인대학 같은 나가시며 무언가 배우는 것과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신다. 고모부는 최근에는 정부에서 노인일자리 창출사업으로 길가변 쓰레기 줍고 용돈 받는 일을 하시는데, 오토바이가 있으신 덕에 하루에 10분 일하고 나머지는 그늘에서 여유롭게 쉬신다고 하셨다. 고모는 지난 봄에 컴퓨터를 배워볼까 해서 수강등록했다가 배우는 곳이 생각보다 멀어 다니지 않기로 하셨는데, 그걸 못내 아쉬워하고 계셨다. 고모댁의 삼형제는 모두 인근 청주나 세종시에 나가 살고 있어서 두분만 사시는게 적적하기도 하겠지만, 고모 말씀으로는 자식들이 잘되는 걸 바라며 사는 것만으로도 힘이된다고 하셨다.


고모네 집앞에 있는 작은 밭

고모가 고기 싸먹을 깻잎을 따고 있다

  저녁밥과 과일을 먹으며 같이 웃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11시를 넘었다. 이제 작은아버지 내외는 고모께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이었다. 나는 원래대로라면 저녁 시간에 읍내로 돌아나오는 시내버스가 없기 때문에 고모댁에서 하루 묵으려 했지만, 지금은 작은집 차가 읍내로 나오는 길이고 더군다나 홍중이가 내일 아침일찍 속리산 문장대에 한번 갔다오지 않겠냐고 해서 나도 고모께 그만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도시로 나와 학교를 다니며 방학이나 명절때 시골 할아버지,할머니 댁에갔을 때면 나는 늘 돌아서는 발걸음에서 두 분에대한 그리움이 깊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면 꼬박 집에 잘 돌아왔으니 잘 지내고 계시라고, 다음에 또 놀러가겠다고 전화드렸던 기억이 난다. 고모댁을 떠나면서도 두분께서 물론 잘 지내시겠지만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한번 더 말씀드리며, 다음에 또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고모댁을 나섰다.


홍중이네로 자정무렵 돌아와서는 가볍게 씻고 늦지 않게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입추와 말복이 모두 지나서인지 잠결에 스치는 밤바람이 선선했다. 아침 6시가 되자 맞춰둔 알람이 울렸고 홍중이와 문장대 갈 준비를 했다. 작은아버지께서 같이 일어나서 등산 짐싸는 걸 도와주셨다. 속리산까지는 홍중이가 모는 차를 타고 가기로 했는데, 읍내에서 간단히 김밥집에서 아침을 먹고 빵집에서 간식을 몇개 더 사서 가방에 넣고 속리산으로 향했다. 

문장대 가는 길, 스님 한분이 저 멀리서 걸어 오고 있었다
  
물이 정말 맑았다. 송사리들이 살고 있었다.

속리산은 보은에 있는 산으로, 그 곳에 있는 법주사로도 유명하고, 그 정상에는 천미터가 넘는 천왕봉과 문장대가 있다. 광복절 휴일을 맞아 많은 관광객들과 등산객들이 속리산을 찾았다. 우리는 아짓은 뜨겁게 내려쬐는 여름 한낮의 햇볕을 피해 이른 시간부터 곧바로 문장대에 오르기로 했다. 법주사는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이번 방학, 아니 올해들어서 산은 처음가보는 날이되었다. 예전에는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은 산들도 더러 다녔는데 언제부턴가 산은 잘 안가게 되었었다. 

문장대 오르는 길

홍중이가 산을 잘 타고 있다

지난 여름 내 다리에 남은 햇볕의 흔적


그런데 오늘 천미터 고지의 문장대를 향해 올라가다보니 산을 오르는 묘미를 다시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묘미라고 해서 별다른 건 없고.. 힘든만큼 보람되다? 뭐 그런거.. 그나마 서울에서도 웬만한 거리는 주로 걸어 돌아다녀서 그런지 아주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반쯤 오르니 나도 모르게 가끔 한숨이 쉬어지기는.. 했다. 나중에는 그 한숨도 아껴쉬었다.. 문장대 코스는 천왕봉 코스보다 더 가파르게 놓여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간에 많이 쉬면 쉴수록 더 힘들다는 걸 잘알았기에, 4번째 마지막 휴게소 때까지는 한번도 쉬지 않고 올라갔다. 마지막 휴게소를 조금지나 흐르는 물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잠시 쉰게 전부였다. 산에서 흐르는 물이라 맑고 차가웠다. 비어있는 물병을 채우고 얼굴과 목, 그리고 팔에 물을 시원하게 끼얹었다. 가방에는 빵도 있고 여러개 있었지만 역시 물이 최고였다. 집에서 싸간 포도도 다시 힘을 내는데 좋았다. 그렇게 앉아서 10분 남짓 쉬고나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에 다다르는 마지막 나무 계단

문장대로 가는 나머지 오르막길의 끝에는 헐떡고개라고 이름이 붙여질 정도의 급경사를 포함해 가파른 산길이 줄을 이어있었다. 한동안 좌우로는 거대한 바위들이 늘어서있었고 우거진 초록의 나무로 머리 위 시야는 대부분 가려져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눈에 텅 빈 푸른색이 점점 더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햇볕과 바람도 사방으로부터 여러 줄기로 우리에게 부딪혀 오고 있었다. 산 정상으로 다다르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확 트인 공간에 속리산의 장엄함이 우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문장대

문장대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다


볕도 바람도 우리 곁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거쳐 흐르고 있었다. 우리와 그곳에 오른 다른 등산객들만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에베레스트를 처음 오른 산악인이 했다는 말이 기억났다. '우리가 정복한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었다' 산을 힘겹게 오르고 그곳 정상에 머무를 때 갖게 되는 느낌이란게 그런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우리들도 그곳에 지속 머무를 수만은 없다는 점에서는 자연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인간이면서도 자연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인간으로 느끼는 이런 느낌과 감정, 그리고 때론 몇몇의 생각들을 나는 소중하고 여기고 싶다. 이 곳에 방금 오른 두 인간은 이제 배가 조금 고프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몇장씩 찍고, 가방을 풀어 싸가지고 올라간 간식들을 먹었다. 


저 아래 경상북도 상주 마을이 보인다


속리산은 충청도와 경상도에 걸쳐있기 때문에 이쪽으로는 충북 보은이고 저쪽으로는 경북 상주였다. 양쪽에서 볼때 속리산의 차이점이라면, 이쪽에서 올라가면 국립공원 입장료 거금 4천원를 내야되고 저쪽 화북에서 올라오면 안내고 올라올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간단히 먹고나서는 주변 풍경을 보며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쉬었다. 안개가 없어서 저 멀리 상주의 몇몇 마을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정상에 함께 올라와있는 등산객들도 많아 더 즐거움이 들었다. 문장대는 5년전쯤에 겨울에 한번 왔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능선을 타고 천왕봉까지 갔었다. 오늘은 조금 무리인거 같아 이 정도에서 그나마 시원할때 내려올 준비를 했다.

 


 홍중이는 고등학교때를 기억했다. 보은에서 학교를 다닐때 전학년이 이곳 문장대 정상으로 극기훈련을 왔다고 한다. 더군다나 속리산 오는길은 예전에는 말티재라는 고갯길로도 유명했다. 열두 번 휘어지는 구불구불한 길을 차로 오를 때는 언제나 아찔하면서도 스릴이 느껴졌었다. 지금은 '속리터널' 700m구간이 뚤리면서 더이상 그곳으로는 차가 다니지 않는데, 극기훈련 때는 그곳마저 걸어올라왔다고 한다. 문장대 정상에서 학생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위험해 보이면서도 나름 스릴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그런 재미로 문장대에 오르겠다면 그건 조금은.. 아니다. 어느 산자락이든 어느 정상이든 산은 가볍게 보면 안되기 때문이다.



 홍중이와 나도 이제 산을 내려오는 입장에서 마냥 우습게 보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럴수가 없다. 가파른 경사는 오히려 오르는게 더 안전하다. 그래서 그런 곳의 내리막은 언제나 더 주의해서 내려와야 한다.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는게.. 급경사를 다 지나고 나서는 이제 여유롭게 발길을 놀리고 있었다. 

내려 오는 길에 돌을 얹고 소원을 비는 곳이 있었다

누군가 이끼로 덮인 바위에 낙서를 해놓았다



선선한 바람이 발길을 가볍게 해주었다. 뒤늦게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얼마남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한테는 가벼운 마음으로 얼마 안남은 척 답해줄 수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르는 가족들이 의외로 많았다. 아이들은 어디서 힘이 나는지 어른들보다 더 신나하며 산을 오르곤 했다. 저러다 내려갈땐 업어달라고 하려나? 싶기도 했다. 아이들이 힘내어 오르는 모습에서, 올라올 땐 보지못했던 산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즐거움 속에서, 점심을 먹으러 간다는 희망 속에서.., 힘을 내어가며 산을 가뿐히 내려왔다.


법주사 가는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에 사람들이 발을 담그고 있다

다 내려와서는 법주사를 둘러봤다. 정오무렵이라 그런지 아침에 올라갈 때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이들 보였다. 때마침 팔상전은 보수공사를 하고있어서 천년된 목조건물을 보고 가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절 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가니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법주사 입구. 금강문

철당간이 높게 솟아있다.(좌) 팔상전은 보수공사 중이다.(우)

법고(북)의 찢어진 곳을 테이프로 막아 쓰는 것이 인상적이다.(좌) 쌍사자 석등.(우)

대웅보전 앞 나무 아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앉아 있다


 우리는 법주사를 나와 이제 국립공원 매표소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밖으로 많이 펼쳐져 있는 음식점중에 홍중이가 잘 아는 집에 들어가 감자전등을 맛있게 먹었다. 이제 다시 힘이 난 우리들은 속리산을 내려와 보은 홍중이네 집으로 돌아왔다. 차 안에 에어컨을 켜지 않고 열어둔 창문으로 넘나드는 시원한 바람에 산을 오르고 내리던 힘든 일은 어느새 또하나의 이번 여름 추억이 되고 있었다. 홍중이나 나나 이제 개강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앞으로 서로가 가는 길에서 맞딱드리게 될 힘든 일들과 그것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에 오늘과 같은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2013.8.16
김홍성

2013-08-14

Quote: 59

계획을 구체화하지 않은 목표는 한낮 꿈에 불과하다.
A goal without a plan is just a wish.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ery

Lecture: (TED) '동기 유발의 놀라운 과학' - 다니엘 핑크


*원제: 'The puzzle of motivation'

*강연자: Daniel Pink


Career analyst Dan Pink 가 동기 유발의 수수께끼에 대해, 먼저 사회과학
학자들은 알고 있지만 일상 관리자들은 알고 있지 못한 사실 : 전통적인
 보상의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항상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With a trio of influential bestsellers, Dan Pink has changed the way companies view the modern workplace. In the pivotal A Whole New Mind, Pink identifies a sea change in the global workforce -- the shift of an information-based corporate culture to a conceptual base, where creativity and big-picture design dominates the landscape. 

2013-08-13

Quote: 58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고 원하는 일을 한다면
일과 놀이의 구분은 사라질 것이다.
When you're following your energy and doing what you want all the time, 
the distinction between work and play dissolves.

- 삭티 거웨인
Shakti Gawain

Lecture: (TED) '위대한 리더들이 행동을 이끌어 내는 법' - 사이먼 시넥

*원제: 'How great leaders inspire action'

*강연자: Simon Sinek


사이먼 시넥은 영감을 주는 리더쉽과 관련해 금원(골든 써클)과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모형을 선보입니다. 그는 애플, 마틴 루터 킹, 라이트 형제의 사례와 그 반대 사례로(최근 법정에서의 승리로 주가가 3배 상승할 때까지는) 꽤 고군분투한 티보사의 예를 들고 있다. 

Beginning as a student in anthropology, Simon Sinek turned his fascination with people into a career of convincing people to do what inspires them. His earliest work was in advertising, moving on to start Sinek Partners in 2002, but he suddenly lost his passion despite earning solid income. Through his struggle to rediscover his excitement about life and work, he made some profound realizations and began his helping his friends and their friends to find their “why” -- at first charging just $100, person by person. Never planning to write a book, he penned Start With Why simply as a way to distribute his message.

2013-08-11

People: 고교친구들과 마주한 남해바다 (전남 여수, '13.8.10-11 // 동찬,석배,우석,헌규)




동찬, 석배, 우석, 헌규



 8월 한여름 무더위 속에 잠을 설치곤 하던 새벽시간에 
오늘은 알람보다 일찍 눈이 떠졌음에도 더이상 자려고 하지 않았다.
정신도 맑아있어서 잠시 조용히 누워 그간의 생각들을 가볍게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어느새 맞춰둔 알람이 울렸다. 새벽 4시 50분.
강남터미널에 예약해둔 익산가는 8시 버스를 타기위해 슬슬 준비를 했다.
오늘은 고등학교 친구들 동찬,석배,우석,헌규와 점심무렵에 익산에 모이기로 했다.
같이 모여서 동찬이 차를 타고 남해바다를 보러가기러 했다.
익산에서 모이는 건, 익산이 우리들이 사는 곳들 중 가장 남쪽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동찬이가 익산에 있기 때문이다.

 동찬이는 익산에 있은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이곳에서 생활해왔으니 말이다. 원광대 한의학 학부 6년이 무엇보다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인턴을 거쳐 레지던트 마지막 3년차를 하고 있다. 동찬이가 평소 강조하는 대로 자신의 연고와 자리를 스스로 만드는데에 그 시간들을 잘 쏟아온 것 같다. 정말로 그런지는 내 눈으로 확인해 본적도 있었다. 인턴 때 한 번, 레지던트 때 한 번. 두 번이나 여행중에 동찬이한테 느닷없이 들렸던 기억이 난다. 병원에서는 신참이었을때라 저녁때까지 병실 환자들을 체크하며 빠듯하게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다 하루 업무를 마치면 일단락 되는가 싶다가도, 병원안 작은! 숙소에서 넉넉하지 많은 않게 지내며 환자들 간호에 긴장을 늦출 수만은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찬이는 그 시절이 많이 힘들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런 모습에서 의사로서 동찬이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동찬이는 지금까지도 가끔씩 말하지만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좋은 가정을 꾸리고 살며, 한 마을에 한의원 하나를 차려서 그곳 사람들 치료해주며 살기를 바란다.
그런 앞날을 살아가려는 자세가 병원 신참시절에도 내 눈에는 들어오곤 했다. 느닷없이 찾아 온 나에게도, 일이 끝난 후 자기방으로 치킨을 시키고 동기누나들까지 같이 불러서 병원 얘기를 재밌게 들려주곤 했다. 잠도 재워줬으니, 작은!방이었지만 거기서 두 번이나 숙식을 해결해 준 셈이다. 다음날 아침 다시 출발하는 나를 배웅하며, 일상처럼 근무를 시작하는 동찬이 모습에서 안정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동찬이는 조금은 고민이 있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내년부터 해야할 군역 담당과 그 이후의 진로등에 대해서 고민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 모두는 동찬이가 겪고 있는 성장통을 저마다 다른 모습이지만 하나같이 앓고 있는 걸 확인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안정된 생활을 해서 아무 고민도 어려움도 없이 사는 것보다는, 이렇게 고민들을 끊임없이 앉고 살면서도 그것들을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우리들 모습이 더 좋은 거 아니겠냐고 말을 던졌다. 동찬이가 그 말을 떨어뜨리지 않고 잘 받아준 거 같아 고마웠다. 그리고 동찬이가 다시 던져주는 말들에도 나와 다른 친구들도 기꺼이 두 손을 모아, 석배는 슬라이딩을 해서라도 받아냈다. 동찬이가 또다른 10년 후에는 어느 동네에 한의원을 차려 맥을 짚고 있을지.. 조금 이르지만, 지금부터 기다려진다.



나는 서울에 살고있는 헌규와 함께 버스 시간에 맞춰 터미널에서 만나, 익산으로 향했다.
세시간이라는 긴 시간은 헌규하고, 지난번 같이 축구를 끝내고 차로 나를 데려다 주며 얘기했던 것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며 갈 수 있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이전에 적었던 글에서 헌규는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했던거 같다. 그러면서도 청춘으로써 무언가 고민하고 있다는 느낌도 적어 두었던 것 같다. 오늘 헌규는 그 것들에 대해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헌규는 지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말하고 설득하는 과정 속에서 마음이 편치많은 않은 것 같다. 나는 헌규를 억지로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헌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신념들과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예들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었다. 헌규가 그 말들에 조금이나마 힘들 얻은 것 같아 내가 오히려 고마웠다. 헌규는 자신의 생각을 조금더 구체화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신중하면서도 긍정적으로 이어갔다.
이번 여행에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정말 힘이될 수 있는 소리들을 헌규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이 해주었다. 이런 모습을 위해 지난번 헌규에게 이번 여행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봤던 거였는데, 그때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이렇게 정말 같이 다녀올 수 있게 되어 헌규와 우리 모두에게 더 좋았던 시간이 된 것 같다. 같이하는 여행은 끝났지만, 우리들이 같이 나눠준 이야기들이 헌규에게 힘이 되고, 그래서 지금 갖고 있는 고민들을 잘 정리해서 나아가고 있는 더 나은 모습으로 다음에 보기를 바란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헤어지기전에 헌규가 밥도 사줬다, 그래서 다음엔 내가 사주겠다고 했는데.. 이 말도 힘을 보태주고 있겠지..헌규야?




세시간을 휴게소 한번 쉬고 줄곧 달려와 헌규와 내가 먼저 동찬이한테 도착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친구들을 기다렸다. 석배와 우석이는 청주에서 같이 기차를 타고 오고 있었다. 우석이는 근무를 쉬는 날들이기 때문에, 지난번에 같이 축구하러 광명으로 올라오던 때처럼 마음 편하게 익산으로 내려 오고 있었다. 그런데 석배는 한결 빠듯한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석배는 지금 포천에서 장교로 군생활을 하고 있다. 한 주 밀려서 받아낸 2박3일 휴가에, 금요일에는 청주 집으로 내려왔고, 여행 첫날인 토요일은 그렇다 쳐도, 일요일엔 복귀 시간을 고려해서 또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포천이면 우리나라 맨 위쪽인데, 남해를 보려면 우리나라 맨 아래로..  2박3일동안 그 거리를 왕복해야하니 빠듯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석배를 모시고! 다녀야 하는 우리들로서도 같이 빠듯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럼에도 석배는 꼭 바다를 눈앞에서 보고자 했는데, 그 의지덕택에 밤과 낮 모두에 남해바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석배는 이런 자세로 소위 시절을 잘 마치고 지금 중위를 하고 있다. 학군으로 조금 늦게 임관했지만, 자기 아래에 있는 병사들을 잘 이끌고 잘 챙기며 그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만족감과 자신감 속에서 군생활을 잘 보내고 있다. 그런데 석배에게 이번 여름은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하는 시간이 되고 있다. 누구보다 잘 하고 있는 군생활에 대해 그것을 장기적으로 지속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친구들은 이에 대해서 다들 솔직하게 자기 의견을 말해주었는데, 그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말들이 기억난다. 석배가 지금 장교로서 잘하고 있는 것은 그곳이 꼭 군대여서라기 보다는, 이미 그만큼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석배가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군대가 되었든 사회가 되었든 어디를 가든 인정받고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들이었다.
나는 여기에 더해 예전부터 석배가 가끔씩 나에게 들려주었던 자신의 꿈들을 기억해내 모두들 앞에서 들려주었다. 석배는 대학에서 토목학을 전공했는데, 예전에 나한테 그랬다. 자신은 자기 이름으로 된 다리 하나를 놓고 싶다고. 그당시 감상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던 이야기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얘기가 인상깊게 다가온다. 석배가 앞으로 그런 다리를 결국 놓느냐 안놓느냐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순수함이 석배가 갖고 있는 장점이란 걸 일깨워 주고 싶었다. 또 하나 기억나는 걸 이야기 했다. 석배는 동찬이가 말하듯 수학하면 석배지라고 할 정도로 수학을 잘하고 좋아했다. 그래서 학문으로서 수학 공부를 계속하는 것도 생각해봤다고 애기했었다. 그러다보면 교수같은 직업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두가지 이야기에 대한 기억들을 되돌려주며 석배가 조금은 더 넓게 진로를 결정했으면 했다. 석배뿐만 아니라 우리 다섯 모두가 겪고 있는 진로에 대한 고민들에는 '안정'이라는 문제가 담겨있다. 경제적,사회적 안정과 같은 문제들 말이다. 우리들은 각자의 고민을 말하고 서로 의견을 말하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이야기들이 겉은 다르지만 안은 다르지 않은 것임을 알면서도, 긴 대화의 끝에도.. 우리 모두 여기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들이 청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중에 '안정'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안정이라는 것은 고요한 물 위에 떠있는 종이 돛단배는 아니었다. 파도가 가파르게 너울대고 비바람이 거세개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도그 중심을 잃지 않고 있는 어선 한 척의 모습, 그것이 우리가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안정'인 것 같았다. 그래서 석배가 지금 마음 속에 품고있는, 스스로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여자친구에게 안겨주려는 '안정'에 대한 고민을.. 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지한다. 




 먼저 모인 셋은 기차를 타고 오는 둘을 마중나갔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동찬이 차로 움직였다. 원래 차가 저렇게 좋은게 아니었는데.. 끌고 다니던 차가 고속도로에서 느닷없이 멈추는 바람에 불행중 다행이다 싶어 차를 바꾸었다고 한다. 예전차에서 느껴지던 차안의 소음과 땅의 굴곡이 어느덧 추억이 되었다. 그걸 경험해보지 못한 헌규만 유일하게 매우 아쉬워 했다.
점심은 동찬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논길을 파고들어가면 한가운데 나타나는 전통식 맛집에서 보리밥등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 먼~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전남 여수를 가기로 했는데, 가는길에는 순천이 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순천만을 가본적이 없어서 일단 순천으로 가서 순천만을 걸었다. 매표소 입구에서는 전망대까지 올라가기로 했는데, 전망대가 있는 산 입구에서 다들 살기 위해 멈췄다. 정말 그 어느때보다 뜨겁고 습한 날이었다. 우리는 멈출줄 아는 현명한 판단에 대해 서로를 칭찬하며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길을 다시 돌아서 나오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매표소 출구를 빠져나와 아직 건강히 살아있는 것에 만족하며 다시 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본 목적지인 여수를 향해 갔다.  

그런데 이때부터 라디오를 간혹 틀어놓고 달리던 차안에, 익숙한 노래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찬이가 비틀즈의 '1'앨범 CD를 튼 것이다. 다들 차창밖 순천의 전원적 풍경과 우리의 여행이라는 느낌에 잘 맞아떨어진다고 좋아했다. 그럼 그렇지.. 누가 돈 모아서 선물한건데.
비틀즈의 1위곡들 27개를 모아 놓은 앨범으로, 좋은 가사와 그와 딱들어맞는 멜로디가 인상적인 곡들이 많았다. 즉각 해석은 아니었지만, 나는 알고 있는 정보를 가삿말과 함께 몇몇곡에 붙여서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익숙했지만서도, 막상 그 가사를 알고나니 친구들이 더 멋진 곡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동찬이는 대학을 다니며 밴드에서 보컬을 했다고 한다. 그걸 잘 모르고 사 주었던 거긴 하지만, 두 해 전에 사주었던 CD를 잘 틀어주니 듣기가 더 좋았다. 내가 이 CD를 선물해준 데는 사연이 있다. 동찬이와 우석이는 내가 대학을 가겠다고 대입학원을 조금이라도 다니겠다고 얘기를 했을 때, 선뜻 매달 학원비를 보태주기로 했다. 나는 말이라도 고맙다고 했지만, 정말 매달 자신들이 보여줄 수 있는 성의내에서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나는 대입시험이 끝나고 다른 모든 계획에 앞서 공장을 다녔다. 그렇게 두달 정도를 2교대로 다녀, 무엇보다 친구들에게 받은 돈을 갚았다. 그렇지만 그 고마움은 다 갚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책이나 음악CD 같은거를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성의내에서 주곤 한다. 석배는 그 당시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석배한테서는 공부 내용등에 대해 조금씩 도움을 받았다. 이것도 내가 앞으로 계속 갚아가야 할 고마움이다.




드디어 여수에 들어섰다. 나는 작년에 전국기차여행중에 여수를 걸어서 여행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때는 오기 힘들었을 곳이었는데, 우석이의 추천에 따라 돌산대교로 먼저 향했다.
우석이 말로는 시드니 보다 더 멋지다고 한다. 그런데 도착한 시간이 조금 늦은 편이라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못보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선 여수시내로 가서 숙소를 잡기로 했다. 여수엑스포가 열렸던 곳에 가까이 있는 여수항으로 갔다. 가까운데 숙소를 잡고 가볍게 씻은 후 근처에 있는 횟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는 회를 잘 먹지 않아서 모르는 음식들도 많았는데, 친구들이 해주는 설명을 들으며 하나하나 먹어보았다. 이렇게 저녁을 먹으며, 긴 시간동안 우리는 서로의 고민들에 대해 얘기하고 의견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 먹고 일어날 때는 배도 물론 불렀지만, 모두들의 마음도 조금씩은 불러있었다.
그 마음을 차분히하고, 캔맥주와 과자 몇개를 사서 바로 앞에 있는 여수항 둑으로 갔다.
바닷물을 발 아래두고 둑에 나란히 앉았다.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친구들과 남해바다를 마주하고 앉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율동이 있는 걸그룹 노래를 누가 틀어놓자 몇몇은 따라하고 몇몇은 그 모습을 보며 웃고는 했다. 옆에는 낚시하는 분들도 몇분 계셨고 가족들이 나와서 쉬고있기도 했고 어린애들도 그 옆을 뛰어다녔다. 그렇게 바닷바람에 선선하게 있다가, 모기가  하나 둘 물기 시작할 때쯤 숙소로 그만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조금씩 뭘 더 먹고 케이블 방송 한두개를 틀어놓고 보았는데, 다들 피곤했는지 자정무렵에는 모두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일찍 일어나서 올라갈 준비를 해야했다. 석배의 빠듯한 일정에 따라.
나는 6시에 맞춰둔 알람 때문에 가장 먼저 일어났는데,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서 친구들은 깨우지 않고, 조용히 세수하고 여수항에 나가보았다. 해가 지금 막 뜨는 건 아니었지만, 하루를 맞아 새롭게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우유나 하나 사먹으면서 둑 옆 의자에 앉아 조용히 바라보다가 숙소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 놈들이 7시가 다되가도록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8시에는 출발해야 된다고 어제 그렇게들 얘기해놓고..

소리내어 잠을 깨웠는데, 그래도 안 일어날려고 해서 에어컨을 끄고, 불을 켜놓았다.
그러자 하나 둘 씻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둘 숙소를 나올 채비를 갖췄다.
바로 돌아 올라오기가 아쉬웠는지 우석이가 시간을 내서 돌산대교를 다시 가보자고 했다.
아침무렵이라 어제보다는 더 잘볼 수 있을거라고 했다. 우석이 말대로 먼 바다와 대교 그리고 여수 시내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제 역광이라 못찍은 사진을 비로소 하나찍었다. 사실 하나가 아니라... 수십방 찍은 거 같다. 정말 그럴만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제는 올라가야 했다.
석배와 우석이가 예매해 둔 돌아가는 기차 시간에 무엇보다 꼭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전남 구례 부근에 지리산 자락 곁에 있는 휴게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얘기하거나, 졸거나, 때론 창밖의 멋진 풍경을 보며 익산으로 다시 달려왔다.
내려갈때나 올라올때나 운전은 모두 동찬이가 했는데, 차 보험을 위해서라도 차 주인이 직접 해야한다고 그랬다. 그렇긴해도 정말 고생이 많았다.
우석이도 내려갈때나 올라올때나, 업데이트 안된 동찬이의 네비게이션을 대신해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며 조수석에서 끊임없이 길을 알려줬는데, 역시 정말 고생이 많았다.
석배와 헌규와 나의 편안한 뒷자석 여행에 고생해 준 두 친구가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다음 여행을 생각해서도 미리 고마움을 전하는 바이다.

 익산에 도착하니 헌규와 내가 타고 올라올 서울행 버스가 출발을 바로 앞두고 있었다.
익산역에서 석배와 우석이가 타고갈 기차 시간에 앞서,
서울행 버스가 익산버스터미널에 먼저 있었다.
그래서 우리 둘이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표를 끊고 버스에 오르기 전에 모두 같이 인사를 나눴다.
짧은 이틀이었지만 이렇게 시간을 내어 모여서
같이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 같다.
다음에 또다른 여행을 기약하며,
잘 올라가라고, 너희도 잘 가라고, 그리고 잘 있으라고,
인사하고 손 흔들었다.
서로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앞으로 힘이되기를 바라고,
다시 볼때까지 모두 건강하기를 바라며.


2013. 8. 11
김홍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