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8.14수 - 15목
보은 시외버스 정류장
보은은 할아버지,할머니께서 오랫동안 살아오셨던 곳으로 친가가 있는 곳이다.
여든을 넘기시고 아흔 가까이까지 장수하시다 지금은 두 분 모두 돌아가셨지만
두분이 사시던 집에는 셋째 작은아버지가 살고있고, 읍내에는 다섯째 작은아버지가,그리고 인근 수안면에는 큰딸인 큰고모께서 살고계신다.
나는 아버지가 한때 할아버지,할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짓고 살던 때에 이 곳(보은군 탄부면 사직리)에서 태어나 주로 그분들 손에 의해 길러졌다. 인천으로 올라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전까지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지으신 집에서 아버지가 태어났고 그곳에서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명절이면 이 집에 친척들이 모두들 모여 즐겁게 놀았던 기억들이 난다. 지금 돌이켜보면 시골에서 어린 시절은 참 따뜻하고 정을 많이 느낄 수 있었던 시절로 내 인성의 많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때 같다.
올해 초 아직 겨울 추위가 다 가시지 않았을 때 큰고모댁에 들렸었다.
그리고 여름에 다시 놀러오라고 하셨었는데, 개강하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내려갔다. 다음달에는 추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땐 청주 집에 차례만 잠시 지내고 올라오는 것으로 할 겸, 이 참에 보은에 꼭 갔다 오려고 했다. 그래서 큰고모댁 뿐만 아니라 작은아버지댁들에도 같이 들리기로 했다. 그런데 시골집에 계시는 작은아버지 내외가 마침 농사일이 바쁘던 하루라 그곳에는 다음에 가기로 했다.
보은 읍내
보은에 가려면 서울에서 청주로 고속버스를 타고간 다음, 청주에서는 보은까지 시외버스를 타야한다. 길이 막히지 않으면 4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보은 터미널은 어릴적부터 있던 그 자리에 줄곧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시장이 크게 놓여있는데, 오랫만에 시장을 따라 걸어가봤다. 할머니께서 내 손을 잡고나와 읍내에 나와 시장에서 면바지를 사주던 기억들도 나고, 어머니께서 공판장에 자리를 내어 과일을 팔던 기억들도 났다. 시내버스 정류장 위치나 도로 생김새들도 거의 바뀌지 않아서, 잠시 눈을 감으면 어릴 때 본 읍내풍경이 쉽게 그려졌다. 그런데 마냥 이 곳의 추억에 잠겨있을 수 만은 없었다.
초등학교 옆 분수대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보은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6시가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읍내에 있는 홍중이네(다섯째 작은아버지 댁 막내 아들, 나의 사촌)집으로 갔다. 읍내를 둘러보며 한 10분만 걸으면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랫만에 뵙는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께 인사드렸다. 작은아버지께서는 보은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계시는데, 몇년전부터는 집안 제사를 물려받아 지내시는 등 친척들도 잘 챙겨주시는 편이다. 작은어머니께서는 가끔 건강이 안좋으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지금은 건강히 보기 좋은 모습을 하고계셔서 다행이었다. 막내 홍중이는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지난달 인천에 사는 또다른 사촌인 홍경이와 유럽 여행을 한 달간 다녀오고나서 개강전까지는 잠시 보은집에 머물고 있다. 큰딸 민정이는 병원약국에 근무하며 서울에서 일하고 있어, 지금은 작은집에 가족 셋이서 지내고 있었다. 나는 두분께 인사를 간단히 드리고, 홍중이와 함께 차를 타고 인근 수안면 큰고모댁으로 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말씀을 드리자 작은아버지 내외도 오랫만에 같이 고모댁에 인사 겸 가고자 하셨다. 그래서 넷이서 차를타고 작은집을 출발해 나와 읍내에서 고기와 과일을 사서 싣고 고모댁으로 다같이 가게됐다. 아무래도 홍중이하고둘이만 가는 것보다는 더 좋은 일이 됐다.
고모댁 가는 길
20여분 차를 몰고들어가니 고모댁에 도착했다. 저녁도 안드시고 있으면서 기다리시다가 우리가 오자 반갑게 맞아주셨다. 고모는 나 혼자 오는 줄로 알고 있으시며 저녁 밥을 준비해놓고 계셨었는데, 작은집과 함께 같이 놀러를 오니 아무래도 더 반가워 하셨다. 고모는 아버지 형제 중 가장 어른으로 고모부와 함께 두분 모두 지금 연세가 일흔이 넘으셨다. 나이가 드시면서 어쩔 수 없이 몸이 약해지는 것과 병이 드는 것을 빼면 고모나 고모부 모두 마음은 아직 젊으신 것 같았다.
고모가 집 앞에 고추를 바구니에 담아 두고 말리고 있었다
고모부, 작은아버지 홍중이가 거실에서 저녁 준비중이다
고모와 작은아버지 내외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고모부는 보은에서 지관(선산이나 묘자리를 봐주는 일)을 하고 계시고, 고모는 조그만 밭을 일구면서 읍내 노인대학 같은 나가시며 무언가 배우는 것과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신다. 고모부는 최근에는 정부에서 노인일자리 창출사업으로 길가변 쓰레기 줍고 용돈 받는 일을 하시는데, 오토바이가 있으신 덕에 하루에 10분 일하고 나머지는 그늘에서 여유롭게 쉬신다고 하셨다. 고모는 지난 봄에 컴퓨터를 배워볼까 해서 수강등록했다가 배우는 곳이 생각보다 멀어 다니지 않기로 하셨는데, 그걸 못내 아쉬워하고 계셨다. 고모댁의 삼형제는 모두 인근 청주나 세종시에 나가 살고 있어서 두분만 사시는게 적적하기도 하겠지만, 고모 말씀으로는 자식들이 잘되는 걸 바라며 사는 것만으로도 힘이된다고 하셨다.
고모네 집앞에 있는 작은 밭
고모가 고기 싸먹을 깻잎을 따고 있다
저녁밥과 과일을 먹으며 같이 웃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11시를 넘었다. 이제 작은아버지 내외는 고모께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이었다. 나는 원래대로라면 저녁 시간에 읍내로 돌아나오는 시내버스가 없기 때문에 고모댁에서 하루 묵으려 했지만, 지금은 작은집 차가 읍내로 나오는 길이고 더군다나 홍중이가 내일 아침일찍 속리산 문장대에 한번 갔다오지 않겠냐고 해서 나도 고모께 그만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도시로 나와 학교를 다니며 방학이나 명절때 시골 할아버지,할머니 댁에갔을 때면 나는 늘 돌아서는 발걸음에서 두 분에대한 그리움이 깊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면 꼬박 집에 잘 돌아왔으니 잘 지내고 계시라고, 다음에 또 놀러가겠다고 전화드렸던 기억이 난다. 고모댁을 떠나면서도 두분께서 물론 잘 지내시겠지만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한번 더 말씀드리며, 다음에 또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고모댁을 나섰다.
홍중이네로 자정무렵 돌아와서는 가볍게 씻고 늦지 않게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입추와 말복이 모두 지나서인지 잠결에 스치는 밤바람이 선선했다. 아침 6시가 되자 맞춰둔 알람이 울렸고 홍중이와 문장대 갈 준비를 했다. 작은아버지께서 같이 일어나서 등산 짐싸는 걸 도와주셨다. 속리산까지는 홍중이가 모는 차를 타고 가기로 했는데, 읍내에서 간단히 김밥집에서 아침을 먹고 빵집에서 간식을 몇개 더 사서 가방에 넣고 속리산으로 향했다.
문장대 가는 길, 스님 한분이 저 멀리서 걸어 오고 있었다
물이 정말 맑았다. 송사리들이 살고 있었다.
속리산은 보은에 있는 산으로, 그 곳에 있는 법주사로도 유명하고, 그 정상에는 천미터가 넘는 천왕봉과 문장대가 있다. 광복절 휴일을 맞아 많은 관광객들과 등산객들이 속리산을 찾았다. 우리는 아짓은 뜨겁게 내려쬐는 여름 한낮의 햇볕을 피해 이른 시간부터 곧바로 문장대에 오르기로 했다. 법주사는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이번 방학, 아니 올해들어서 산은 처음가보는 날이되었다. 예전에는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은 산들도 더러 다녔는데 언제부턴가 산은 잘 안가게 되었었다.
문장대 오르는 길
홍중이가 산을 잘 타고 있다
지난 여름 내 다리에 남은 햇볕의 흔적
그런데 오늘 천미터 고지의 문장대를 향해 올라가다보니 산을 오르는 묘미를 다시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묘미라고 해서 별다른 건 없고.. 힘든만큼 보람되다? 뭐 그런거.. 그나마 서울에서도 웬만한 거리는 주로 걸어 돌아다녀서 그런지 아주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반쯤 오르니 나도 모르게 가끔 한숨이 쉬어지기는.. 했다. 나중에는 그 한숨도 아껴쉬었다.. 문장대 코스는 천왕봉 코스보다 더 가파르게 놓여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간에 많이 쉬면 쉴수록 더 힘들다는 걸 잘알았기에, 4번째 마지막 휴게소 때까지는 한번도 쉬지 않고 올라갔다. 마지막 휴게소를 조금지나 흐르는 물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잠시 쉰게 전부였다. 산에서 흐르는 물이라 맑고 차가웠다. 비어있는 물병을 채우고 얼굴과 목, 그리고 팔에 물을 시원하게 끼얹었다. 가방에는 빵도 있고 여러개 있었지만 역시 물이 최고였다. 집에서 싸간 포도도 다시 힘을 내는데 좋았다. 그렇게 앉아서 10분 남짓 쉬고나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에 다다르는 마지막 나무 계단
문장대로 가는 나머지 오르막길의 끝에는 헐떡고개라고 이름이 붙여질 정도의 급경사를 포함해 가파른 산길이 줄을 이어있었다. 한동안 좌우로는 거대한 바위들이 늘어서있었고 우거진 초록의 나무로 머리 위 시야는 대부분 가려져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눈에 텅 빈 푸른색이 점점 더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햇볕과 바람도 사방으로부터 여러 줄기로 우리에게 부딪혀 오고 있었다. 산 정상으로 다다르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확 트인 공간에 속리산의 장엄함이 우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문장대
문장대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다
볕도 바람도 우리 곁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거쳐 흐르고 있었다. 우리와 그곳에 오른 다른 등산객들만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에베레스트를 처음 오른 산악인이 했다는 말이 기억났다. '우리가 정복한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었다' 산을 힘겹게 오르고 그곳 정상에 머무를 때 갖게 되는 느낌이란게 그런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우리들도 그곳에 지속 머무를 수만은 없다는 점에서는 자연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인간이면서도 자연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인간으로 느끼는 이런 느낌과 감정, 그리고 때론 몇몇의 생각들을 나는 소중하고 여기고 싶다. 이 곳에 방금 오른 두 인간은 이제 배가 조금 고프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몇장씩 찍고, 가방을 풀어 싸가지고 올라간 간식들을 먹었다.
저 아래 경상북도 상주 마을이 보인다
속리산은 충청도와 경상도에 걸쳐있기 때문에 이쪽으로는 충북 보은이고 저쪽으로는 경북 상주였다. 양쪽에서 볼때 속리산의 차이점이라면, 이쪽에서 올라가면 국립공원 입장료 거금 4천원를 내야되고 저쪽 화북에서 올라오면 안내고 올라올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간단히 먹고나서는 주변 풍경을 보며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쉬었다. 안개가 없어서 저 멀리 상주의 몇몇 마을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정상에 함께 올라와있는 등산객들도 많아 더 즐거움이 들었다. 문장대는 5년전쯤에 겨울에 한번 왔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능선을 타고 천왕봉까지 갔었다. 오늘은 조금 무리인거 같아 이 정도에서 그나마 시원할때 내려올 준비를 했다.
홍중이는 고등학교때를 기억했다. 보은에서 학교를 다닐때 전학년이 이곳 문장대 정상으로 극기훈련을 왔다고 한다. 더군다나 속리산 오는길은 예전에는 말티재라는 고갯길로도 유명했다. 열두 번 휘어지는 구불구불한 길을 차로 오를 때는 언제나 아찔하면서도 스릴이 느껴졌었다. 지금은 '속리터널' 700m구간이 뚤리면서 더이상 그곳으로는 차가 다니지 않는데, 극기훈련 때는 그곳마저 걸어올라왔다고 한다. 문장대 정상에서 학생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위험해 보이면서도 나름 스릴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그런 재미로 문장대에 오르겠다면 그건 조금은.. 아니다. 어느 산자락이든 어느 정상이든 산은 가볍게 보면 안되기 때문이다.
홍중이와 나도 이제 산을 내려오는 입장에서 마냥 우습게 보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럴수가 없다. 가파른 경사는 오히려 오르는게 더 안전하다. 그래서 그런 곳의 내리막은 언제나 더 주의해서 내려와야 한다.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는게.. 급경사를 다 지나고 나서는 이제 여유롭게 발길을 놀리고 있었다.
내려 오는 길에 돌을 얹고 소원을 비는 곳이 있었다
누군가 이끼로 덮인 바위에 낙서를 해놓았다
선선한 바람이 발길을 가볍게 해주었다. 뒤늦게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얼마남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한테는 가벼운 마음으로 얼마 안남은 척 답해줄 수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르는 가족들이 의외로 많았다. 아이들은 어디서 힘이 나는지 어른들보다 더 신나하며 산을 오르곤 했다. 저러다 내려갈땐 업어달라고 하려나? 싶기도 했다. 아이들이 힘내어 오르는 모습에서, 올라올 땐 보지못했던 산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즐거움 속에서, 점심을 먹으러 간다는 희망 속에서.., 힘을 내어가며 산을 가뿐히 내려왔다.
법주사 가는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에 사람들이 발을 담그고 있다
다 내려와서는 법주사를 둘러봤다. 정오무렵이라 그런지 아침에 올라갈 때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이들 보였다. 때마침 팔상전은 보수공사를 하고있어서 천년된 목조건물을 보고 가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절 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가니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법주사 입구. 금강문
철당간이 높게 솟아있다.(좌) 팔상전은 보수공사 중이다.(우)
법고(북)의 찢어진 곳을 테이프로 막아 쓰는 것이 인상적이다.(좌) 쌍사자 석등.(우)
대웅보전 앞 나무 아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앉아 있다
우리는 법주사를 나와 이제 국립공원 매표소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밖으로 많이 펼쳐져 있는 음식점중에 홍중이가 잘 아는 집에 들어가 감자전등을 맛있게 먹었다. 이제 다시 힘이 난 우리들은 속리산을 내려와 보은 홍중이네 집으로 돌아왔다. 차 안에 에어컨을 켜지 않고 열어둔 창문으로 넘나드는 시원한 바람에 산을 오르고 내리던 힘든 일은 어느새 또하나의 이번 여름 추억이 되고 있었다. 홍중이나 나나 이제 개강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앞으로 서로가 가는 길에서 맞딱드리게 될 힘든 일들과 그것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에 오늘과 같은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2013.8.16
김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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