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햇빛을 견뎌내는 일
짐승들은 건강하고 먹을 것이 충분하기만 하면 행복하다. 그러나 인간은, 적어도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내가 만나는 모든 얼굴에
가냘픔과 슬픔의 빛이 깃들여 있노라.
영국의 시인 블레이크가 한 말이다. 물론 그 종류는 각양각색이지만 당신은 도처에서 사람들이 불행과 마주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근무 시간의 군중에게서는 불안과 지나친 긴장, 소화불량, 경쟁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무관심, 마음놓고 즐기지조차 못하는 초조함, 동료들을 의식하지 못하는 태도 등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 가지 불행의 원인은 일부는 사회 제도에, 일부는 개인 심리에 있다. -물론 개인 심리도 대체로 사회 제도의 산물이다- 나는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사회 제도의 변혁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쓴 적이 있다. 전쟁과 경제적 착취 그리고 잔인성과 공포심을 조장하는 교육의 폐지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제도를 찾아내는 일은 오늘날 문명의 가장 긴급한 과제이다. (*이 책은 러셀이 58세이던, 1930년에 출판됐다)
그러나 한낮의 햇빛을 견뎌내는 일보다 서로 죽이는 일이 덜 무서운 일로 여겨질 만큼 인간들이 불행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그런 제도가 생길 기회는 없다.
이 책을 쓰는 나의 목적은 문명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마다 겪고 잇는 일상적인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불행은 분명한 외부적 원인이 없어 사람들이 거기서 벗어날 방도를 찾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견디기 어려운 불행이다.
나는 이러한 불행의 원인이 주로 잘못된 세계관, 그릇된 윤리, 좋지 못한 생활 습관에 있다고 믿는데,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행복이든 동물의 행복이든 모든 행복이 궁극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가능한 일에 대한 자연적인 열정과 요구를 파괴한다.
이러한 문제는 개인의 능력 범위 안에 속해있는 일이며, 따라서 나는 약간의 행운만 있다면 누구나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변화의 방법을 제시하려고 한다.
러셀의 고백
내가 주장하려고 하는 행복론에 앞서 내 자신의 얘기를 조금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행복하게 태어나지는 않았다. 어렸을 적에 나는 “죄에 싸인 몸이 세상에 지치어...”라는 찬송가를 좋아했다.
다섯 살 때, 나는 내가 앞으로 일흔 살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이제 고작 전 생애의 14분의 1을 살았을 뿐이므로 내 앞에 길게 가로놓여 있는 권태를 거의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느꼈다. 청년 시절에는 삶을 증오했고 늘 자살의 유혹에 시달렸지만 수학을 좀더 알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그 위험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삶을 즐기고 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삶을 더 즐길 수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대부분 손에 넣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본질적으로 달성될 수 없는 욕구 -예컨대 어떤 것에 대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식의 획득 따위-를 깨끗이 단념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주된 원인은 나 자신에 대한 편견을 감소시켰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청교도적 교육을 받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나 자신의 죄, 어리석음, 결점 등을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잇었다. 나는 나 자신을 의심의 여지없이 비참한 사람의 본보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로 나는 나 자신과 나의 결점에 무관심해지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점점 더 외부의 대상, 즉 세간의 일이라든가 여러 가지 지식의 분야라든가 내가 애정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집중하게 되었다.
물론 외부에 대한 관심은 고통을 수반한다. 세상은 전쟁에 휘말리기도 하고, 어떤 부분의 지식은 획득하기 어렵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죽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고통은 자신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고통처럼 삶의 본질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리고 외부에 대한 관심은 그 관심이 생생한 한, 권태를 완전히 막아주는 어떤 활동을 일깨워준다.
반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적극적인 활동을 일으키지 못한다. 기껏해야 계속해서 일기를 쓴다든가, 심리 분석에 익숙하게 만든다든가, 또는 승려가 된다든가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승려도 따분한 절 생활에 젖어서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행복한 것이다. 따라서 승려가 종교에 귀의해서 얻었다고 하는 행복은, 만일 그가 어쩔 수 없이 도로 청소부가 되었더라도 얻을 수 있었을 행복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몰입이 지나쳐 다른 방법으로는 이를 고칠 길이 없는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외부적인 훈련만이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자기에 빠져 있는 사람
자기에 빠져 있는 사람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우리가 흔히 볼 수 잇는 세 가지 타입으로 죄인, 자기 도취자,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을 들 수 있다.
*'Narcissus' by the Italian Baroque master Caravaggio (1597-1599) |
내가 말하는 ‘죄인’이란, 실제로 죄를 저지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죄는 누구나 짓기 마련인 것이기도 하고, 또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내가 말하는 죄인이란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탓하며, 만일 그가 종교인이라면 이를 하느님의 비난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자신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아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자아상은 실제의 자기에 대한 지식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만일 의식적인 사고에 있어서 어머니의 무릎에서 배운 도덕률을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면, 그의 죄의식은 무의식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가 취했거나 잠을었을 때에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취했거나 잠들었을 때 죄의식이 머리를 드는 것만으로도 모든 일에 대한 흥미를 빼앗기에 충분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어릴 적에 배운 온갖 도덕적 금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불경스런 말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술을 마시는 것은 나쁘다, 일상의 업무에서 교활하게 구는 것은 좋지 않다, 무엇보다도 섹스는 죄악이다 등. 물론 그가 이러한 쾌락을 삼가는 건 아니지만 쾌락이 자신을 타락시킨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러한 쾌락은 즐거움은커녕 독이 된다.
그가 진심으로 바라는 유일한 쾌락은 어렸을 때처럼 어머니의 따뜻한 애무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즐거움을 접할 수 없으므로 아무래도 좋다고 느긴다. 그리하여 어차피 죄를 짓기 마련이므로 철저히 죄를 짓기로 결심한다. 사랑에 빠질 때, 그는 여자에게 모성을 기대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려, 자신과 성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여성에 대해서도 존경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애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절망한 나머지 잔인해지고 다시 자신의 잔인성을 뉘우친다. 이런 식으로 상상적인 죄악과 현실적인 뉘우침의 움울한 순환이 새롭게 시작된다.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비정하게 버림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심리이다.
그들을 방황하게 만드는 것은 유년 시절에 깊이 심어진 어이없는 도덕률과 도달할 수 없는 대상(어머니 또는 어머니를 대신하는 자)에 대한 헌신이다. 이와 같은 모성적 도덕의 희생자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년 시절의 믿음이나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한다.
‘자기 도취’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습관적인 죄의식에 반대되는 것이다. 자기 도취는 자기 자신을 찬양하고 또 자기 자신이 찬양받기를 바라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자기 도취는 정상적인 것이며 비난할 것이 못 된다. 자기 도취가 중대한 악이 되는 것은 너무 지나칠 경우이다.
많은 여성들, 특히 상류 사회 여성들의 경우 사랑을 느끼는 능력은 완전히 고갈돼버린 반면, 모든 남성이 자기를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여성의 경우 어떤 남자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그 남자는 이미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여자의 경우처럼 빈번하지는 않지만 남자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그 고전적인 예가 혁명 직전의 프랑스 귀족들의 정사를 그린 저 유명한 소설 ‘위험한 관계’의 주인공이다. 허영심이 이 정도로 극단에 달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있을 수 없고,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만족도 얻지 못한다.
다른 관심들은 더 비참한 상태에 빠진다. 자기 도취자가 위대한 화가에 대한 존경심이 계기가 되어 그림 공부를 하게 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단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는 테크닉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 자신과 관계 없는 주제는 택하지도 않는다. 결과는 실패와 실망뿐이고 기대했던 아첨 대신 비웃음을 받게 된다. 자기 소설 속에서 언제나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상화시키는 소설가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원시인은 훌륭한 사냥꾼이 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리라.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사냥이라는 활동을 즐겼다. 허영심이 어떤 한계점을 넘어서면 모든 활동에 깃들인 쾌락을 말살하고, 불가피하게 피곤과 권태를 일으킨다. 허영심은 대개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며, 이런 경우에는 자존감을 키우는 것이 그 치료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법도 객관적 관심에 의해 자극된 활동에 성공할 때만 효력이 있다.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은 매력적이기보다는 강력해지기를 바라고, 사랑을 받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는 점에서 자기 도취에 빠진 사람과 구별된다. 많은 정신병자와 역사상의 대부분의 위인이 이러한 타입에 속한다.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대한 애착은 정상적인 인간성의 중요한 요소이며, 그 자체로서는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도가 지나치거나 빈약한 현실 감각과 결합할 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불행해지거나 바보가 된다. ...
알렉산더 대왕은 심리학적으로는 정신병자와 다를 게 없었으나, 단지 그에게는 정신병자의 꿈을 실현시킬 능력이 있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꿈을 실현할수록 자신의 꿈의 폭도 넓어져 결국 그는 꿈을 완전히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자 그는 신이라 자처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을까? 폭음, 결렬한 분노, 여성에 대한 무관심, 신성에 대한 요구 등은 그가 행복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인간성의 한 요소를, 다른 모든 요소를 희생시켜가면서 개발했다고 해서 궁극적인 만족을 얻는 것은 아니며, 또한 온 세상을 자신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재료로 삼는다고 해서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통 과대망상증은 병적이든, 정상적이든 모두 심한 모욕을 받은 결과인 경우가 많다. ...
정치적 의미의 억압과 정신분적적 의미의 억압은 그 궤를 같이 한다. 따라서 정신분석적 억압이 명백한 형태로 발생하는 경우, 진정한 행복은 있을 수 없다. ,,,
적절한 한계를 지키는 권력은 행복에 크게 기여할지 모르나, 권력을 삶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다면 비록 외면적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내면적으로는 파멸을 맞게 된다.
새로운 꼬리
불행의 심리적 원인은 다양하지만, 거기에는 분명 공통점이 있다. 전형적으로 불행한 사람은 청소년 시절에 어떤 정상적인 만족을 박탈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그 한 가지 만족을 과대평가하게 되어 자신의 생활을 오직 그 만족을 얻는 방향으로만 이끌게 되고, 자연히 거기에 방해가 되고 성격이 다른 성취들에 대해서는 아주 부당한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는 현대에 와서 더욱 현저해졌고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만족이 아니라, 오락과 망각만을 추구할 정도로 완전한 좌절감에 사로잡혀 결국 쾌락의 광신자가 된다. 다시 말하면 활동을 줄임으로써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술에 취하는 것은 일시적인 자살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행복에 지나지 않으며 불행을 순간적으로 정지시키는 것뿐이다.
불행한 사람은 잠을 잘 못 잔 사람처럼 언제나 불행하다는 사실을 자랑한다. 아마도 이러한 자랑은 꼬리를 잃은 여우의 자랑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이야기. 꼬리를 잃은 여우가 자기만 꼬리가 없는 것이 부끄러워 꾀를 내어 다른 여우들에게 꼬리가 없는 것이 훨씬 좋다고 설득하다가 실패한다는 내용- 과 같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치료법은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새로운 꼬리를 자라게 할 수 있는가를 지적해주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길을 알면서, 일부러 불행을 선택한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 그러므로 나는, 독자들이 불행해지기보다는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다고 가정하겠다. 내가 이러한 희망을 실현시키는 데 도움이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 이 책 메모는 '행복의 정복'(원제:The Conquest of Happiness,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지음, 문예출판사)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텍스트 효과(소제목 및 볼드 처리 등)와 이미지는 필자가 임의로 삽입한 것들입니다.
% '무엇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가'는 이 책의 첫 번째 장입니다. 러셀은 이후의 십여개의 장을 통해 이 불행을 더 자세히 진단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즉 행복에 다다르는 일에 대해 말합니다.
이 책의 전체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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