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06

Books: '독일 교육 이야기' - 박성숙


*책 본문중에서.



독일과 한국의 국어시험 비교


“엄마.”
“뭐?”
“저기,저...”
“뭔데 그래?”

머뭇거리는 작은아이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독일어 시험지잖아? 삼 점이네! 못해도 이 점 이상은 받아오더니 왜 갑자기 그랬어?”
“글짓기가 너무 어려워. 잘 안 돼.”

 3학년 들어 본격적으로 작문을 배우기 시작한 작은 아이는 갑자기 어려워진 독일어 때문에 고생했다. 그래도 ‘스스로 어ᄄᅠᇂ게든 해결하겠지’ 생각하고 내버려 두었더니 점점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3학년 중간고사에서 간신히 3점을 받은 것이다.

 독일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과 비교하여 집에서 한국어를 쓰는 우리 아이는 어휘력이 부족하기도 하고 독일 아이와 같은 수준을 글을 쓰기도 쉽지 않다. 큰아이처럼 독서를 많이 해서 글쓰기의 바탕이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땐 갑자기 어려워진 수준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구나 작문은 독일 학생들에게도 만만치 않을 정도로 쉽지 않은 과목이다.

 ‘스스로 하는 것은 여기까지!’ 나는 역시 어쩔 수 없는 한국 엄마인 모양이다. 독일어 공부가 어려워지면서 더 이상 혼자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독서를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했다. 내 경험에 의하면 독일 학교 공부를 위해서는 책읽기만큼 완벽한 훈련은 없었다. 당장 눈앞에 성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조금 늦은 감이 있다 해도 책 읽는 분위기에 익숙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초등학교 4년동안 교사가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독일어 수준은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룬다. 처음엔 알파벳을 한 글자씩 1년이 넘도록 반복 또 반복하며 배운다.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책을 읽을 수 있을ᄁᆞ?’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기초만 다진다. 그러다 어느새 졸업학년인 4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이미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한 짤막한 글 한 편 정도는 거뜬히 쓰는 실력이 된다.

 초등학생이 독일어 공부에 돌입하는 시기는 작문을 배우는 3학년부터다. 3학년 1학기 때 작은아이의 독일어 중간고사 문제중의 하나는 그림4장을 보고 이야기를 써내는 것이었다.
이 글은 상상력을 담고 있어야 하며, 내용에 어울리는 제목을 붙이고 도입과 결말과 클라이맥스가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 거디다 형용사와 부사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문장의 시작을 중복되지 않게 쓴다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시험에서 문법과 맞춤법이 내용 전개보다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김나지움 고학년과 기본적인 평가기준은 대동소이하다.

 독일어 시험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작문 위주로 바귄다. 독일어뿐만 아니라 영어, 사회, 과학과목ᄁᆞ지 모두 같은 유형의 문제가 주를 이룬다. 독일 공부가 겉으로 느슨해 보인다고 만만하게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어느 정도라도 성적을 유지하려면 수박 겉핥기식의 암기로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대학에나 가야 볼 만한 깊이 있는 문제가 이곳에서는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에서 다뤄지기 때문이다.

 김나지움 10학년때 큰아이의 학기말 독일어 시험문제는 <만약 상어가 인간이 된다면>이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유명한 우화를 읽고 분석, 비평하는 문제였다. 두 시간 동안 A4용지 5장 분량의 작문을 통해 우화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글에 숨겨진 교훈을 찾아낸 뒤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써야 한다.

 문제도 쉽지 않지만 답안지를 보면 더욱 놀라게 된다. 엄청나게 복잡한 데다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선생님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다. 게다가 답안지 끝에는 항상 “많이 좋아졌구나! 앞으로 계속해서 이렇게 하기 바란다.‘라든가 ’이번엔 좀 어려웠나보구나. 다음에는 더 노력해서 좋은 성적을 내도록 해라!‘등 아이에게 남기는 짤막한 메시지까지 적혀 있다.

 도대체 수십 장의 시험지를 이렇게 하나하나 채점하려면 일이 얼마나 많을까. 아이가 독일어나 영어 답안지를 받아오면 한 장 가득 세분하여 매겨진 점수판에 놀라다가, 토씨 하나 건너뛰지 않고 잡아내려는 흔적이 역력한 빨간 글씨를 보고는 입을 딱 벌리고 만다. 독일 선생님은 일한다고 물만을 놓다가도 시험지를 받아보면 투덜거릴 수가 없다.

 독일은 긴 겨울방학이 없는 대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등 분기별 시험이 끝나면 2주 정도 단기 방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마다 채점하는 데 워낙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교사들은 여름방학을 제외하면 아예 휴가는 생각할 수도 없다고 한다. 컴퓨터에 답안지를 집어넣기만 하면 전교 석차까지 자동으로 계산되어서 나온다는 한국의 교사가 독일 교사보다 이 부분에서만은 편하겠다.

 나는 큰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한국과 독일 국어교육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경험했다. 세 살 때 독일에 와서 하루도 쉬지 않고 내가 아이를 위해 신경 쓴 부분은 다름 아닌 한국어였다. 자신 있게 가르칠 만한 과목이기도 했고, ‘언어를 완벽하게 하나 더 구사한다면 아이 인생이 얼마나 더 풍요로워질까’ 생각하니 힘들기는 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한국어는 집에서 계속 사용한다는 장점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한국 문제집을 구해다가 차례로 배웠고, 지금은 중학교 1학년 2학기 과정인데 아이는 이제 한국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간다고 느낄 만큼 요즘 들어 부쩍 어휘가 다양해지고 대화 수준도 제법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한글공부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하려고 하루에 20분 이상을 넘기지 않으려다 보니, 같은 학년의 진도를 따라가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저학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되는가 싶었지맍 고학년에 가니 학교 공부량도 많아진 데다 수준이 점점 높아져서 이제는 겨우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만 유지할 뿐이다.

 그래도 지금 중학교 1학년 2학기 문제집을 푸는 아이가 평균 90점 이상의 점수를 받는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하다. 그런데 텍스트를 써보라고 하면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문장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워한다는 게 더 신기하다. 문제집을 풀 때면 한국 시험이 식은 죽 먹기라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말이다.

 논술 공부라는 말이 없었던,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닌 시절에는 국어시간에 글 한 줄 써보지 않았고, 시험도 정답 번호를 찍기만 하다가 졸업했다. 큰아이를 통해 당시 우리의 국어 실력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 시대에는 명문 대학을 졸업했어도 편지 한 장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허다했던 것이다.

 독일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된 작문시험이 대입시험까지 이어진다. 물론 저학년에서는 문법과 맞춤법이 중요시되기는 하지만 6학년만 되면 이미 독일어 시험에서 문법은 사라지고 오직 작문 실력이 평가기준으로 남는다. 독일 학교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가장 어려운 과목이 독일어이다. 충분한 독서량과 논리적인 사고와 창의적인 생각이 동시에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가기가 힘드랃.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글쓰기는 달달 외운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단기간에 들입다 판다고 될 일도 아니다. 아비투어에서 독일어 시험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13학년까지 체계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해서 마지막으로 치르는 논술 시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학생들 대부분이 시험을 위해 단 한 번의 과외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논술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요즈음 한국 학교에서는 글쓰기를 어떻게 지도하는지 궁금하다. 설마 학우너에 모든 것을 의학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여기에 생각이 이르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설마 그럴까....






명문 대학 없는 독일


 한국에서 대학이 평준화된다면, 서울대학이 없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독일 학생이 경쟁에 찌들지 않고 여유롭게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명문 대학이 없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중고등학교 때는 함께 어우러져 사회성과 인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야 비로소 공부다운 공부를 시작한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독일의 베를린 공대나 하이델베르크대학, 아헨 공대는 정작 족일인에게는 관심 없는 이름이다. 학생이 대학을 먼 도시로 가는 경우는 자신이 원하는 학과가 지금 사는 곳의 대학에는 없다거나 경쟁자가 유독 많아 인근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을 경우지, 대학 이름을 찾아 이사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다는 것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는 나도 이 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육열에 불타는 젊은 한국 엄마라면 모두 자기 아이가 어릴 때는 천재라고 착각하듯 나도 그랬나 보다. 아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1등만 할 것 같은데 공부를 잘해도 보상이 없다는 독일 교육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는 대학평준화 때문에 아이가 풍요로운 청소년 시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평준화는 비인간적인 경쟁을 조장하지 않는다. 대학도 중고등학교처럼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고르게 입학한다. 독일 대학에는 학과마다 몇몇 수재가 눈에 띈다. 그들이 한국에서라면 명문 대학을 갔으 학생이고, 독일을 이끌어갈 인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대학 이름으로 일류와 이류로 나뉘지 않는다. 어느 학과를 졸업했느냐가 중요하지 어느 대학이냐는 진로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 간 교류와 이동이 자유롭다.

 또한 전체 대학이 고른 수준을 유지한다. 한국이나 일본, 미국 등 여타의 나라처럼 1등만 입학할 수 있는 명문 대학이 없나는 뜻은 인재가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가 <더타임스> 세계대학평가 발표에도 잘 나타난다.
2009년에 발표된 <더타임스>의 세계대학평가에서 한국은 4개 대학이 200위에 들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끊임없이 교육에 투자한 결과가 이제 서서히 수치로 나타나는 것이다. 순위 안에 든 4개 대학은 잔치 분위기 속에서 총장의 리더십이 뛰어났다거나 대학혁신의 결과라는 등 자화자찬에 열을 올렸다.

 그럼 독일은 어떨까? 독일은 가장 우수한 대학으로 평가받은 뮌헨대학이 55위에 그치면서 선진국 중 50위권에 든 대학을 하나도 배충하지 못하는 불명예를 기록했다. 20세기 초 독일이 누렸던 학문적 명성은 빛바랜 추억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ᄁᆞ?
이해를 돕기 위해 비영어권 나라 중 관심 있는 몇몇 나라를 중심으로 표를 만들어 보았다.
표에 나타난 결과로 보면 독일은 강대국 중 유일하게 50위권에 대학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물론 도표 상으로는 참담해 보이겠지만 독일 교육제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결과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런 제도를 유지함에도 200위 안에 10개나 되는 대학이 들었다는 것이 놀랍다.

 50위 안에 든 대학은 없었지만 뮌헨공대를 시작으로 괴팅겐대 등까지 10개 대학이 크게 수준차이를 보이지 않으면서 200위 안에 진입했다.

 한국은 서울대학이 47위를 했고 독일은 뮌헨대학이 그보다 못한 55위를 했지만 이 결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봐야 한다. 서울대학은 한국 최고의 수재를 한 곳에 모아 집중적으로 투자해 얻은 결과지만 뮌헨대학은 바이에른 지역을 대표하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몇몇 학과가 약간 유명할 뿐 다른 대학과 큰 차이가 없는 평범한 대학일 뿐이다.

 교육 관련 글을 쓰면서 독일 부모나 선생님을 만나면 집중적으로 교육 이야기를 한다. 내가 만난 모든 독일 선생님과 학부모는 대학 때문에 먼 곳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은 전체적으로 대학 수준이 고르며, 중간으로 갈수록 두터워진다. 또한 500위 안에 든 대학이 영구 다음으로 가장 많은 나라다. 인재의 고른 분포와 주 정보의 공편한 지원이 대학의 전체수준까지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대학평준화는 입시 경쟁을 해소하기 위한 해법만은 아니다. 인재가 더나지 않고 지역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진정한 지방자치제를 이루는 근간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독일인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태어난 도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졸업하여 그 도시의 직장에 다닌다.

 도시라고 해도 한국의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구 30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에 사는 독일인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내거 거주하는 아헨은 대학도시기이 때문에 경제시설이 부족한 관계로 밥벌이를 위해 떠나는 사람이 있지만, 어쨌든 독일인은 태어난 곳에서 계속 살며 공부하고 일하는 삶을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알다시피 한국에서는 시골이나 소도시의 수재가 고향에 남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독일은 이렇게 좋은 제도를 가졌으면서도 대학의 줄세우기를 무시할 수만은 없는 듯 2006년부터 국제경쟁력을 키운다는 명분으로 엘리트 대학을 선정하여 지원하고 있다. 현재 아홉 개 대학이 선정되었고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대학도 있지만 이 정책이 실효를 거두는지 구체적인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또한 ‘몇몇 엘리트 대학을 만들기보다는 전체적인 대학의 질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과연 엘리트 대학 양성이 한국처럼 극심한 입시경쟁을 유발할지 미지수다.

 정부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달리 국민은 시큰둥한 입장이라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대학은 크게 없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꾸준히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독일에도 국제경쟁력에서 앞서가는 명문 대학이 생길 것이다. 그날엔 독일도 세계대학평가 순위명단 상위권에 진입하겠지만 그것을 위해 학생은 무엇을 내주어야 할까?

 아마도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적을 올려 명문대를 가기 위해 과외를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교육 시스템이 발 빠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다. 과외를 받은 학생과 받지 않은 학생 간에 차이가 발생할 테고 고액과외비를 낼 만한 부자의 자녀들이 명문 대학에 많이 입학할 것이다. 이미 사회는 명문대 출신이 아니면 잉여인간 취급을 하고, 기업 또한 골치 아프게 인성이니 능력이니 따질 필요 없이 일단 명문 대학을 나온 이를 먼저 채용한다. 아, 이것이 바로 한국의 모습이 아닌가.

 유급 위기에 처하지 않고는 과외가 필요 없는 지금의 독일 학생은 여행을 즐기고 운동이나 음악활동 등 다양한 취미생활을 통하여 젊음을 만끽한다. 명문 대학이 있다면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생활을 계속해서 영위하는 사람은 이미 청소년기에 인생의 낙오자로 낙인찍힐 테니 말이다.

 어느 지역 어느 동네에 살든지 수준이 비슷한 대학에 진학하는 일은 옛날이야기가 되어, 명문 대학이 없는 고시는 엘리트들이 모두 명문 대학을 찾아 떠났기 때문에 점점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독일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무겁다.

Books: '디퍼런트' - 문영미


*문영미 교수가 지은 '디퍼런트'의 서문.



동일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큰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 학교에서 숙제로 받은 시를 집으로 들고 와서 외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주 새로운 시를 가지고 왓다. 덕분에 나도, 스펀지같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아들의 머리가 시의 모든 구절을 완벽히 흡수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어주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아들과의 숙제 프로젝트는 최소한 한동안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들이 하고 있는 이 정신적 스트레칭에 나는 조금식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10년가량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을 가르치고 있었다 강의의 목표는 비즈니스 세계의 언어로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학생들에게 비즈니스의 ‘문법’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학생들이 이 문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흡수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은, 이 방법은 분명 가시적인 효과는 있지만, 학생들을 기계적인 사고에 가두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반복 학습이 사고능력과 상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위험을 진작 개달은 많은 교수들은,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강의방식을 최대한 멀리하고 있다. 그들은 똑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것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시도를 중단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비즈니스 세계는 아직까지 반복 학습의 단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비즈니스 세상에서 활약하고 있는 많은 전문가들이 지금 이러한 단계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창조적이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해 내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을 분석하는 지식과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비즈니스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지나치게’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들의 사고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돌아가면서 똑같은 제품을 반복해서 만들어 내는 기계와도 같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경영학 교수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시민이고, 아내이고 그리고 엄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경험하고 있다. 이웃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할인마트에 가서 샴푸, 주스, 운동화 등을 산다. 그리고 때로는 마트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브랜드에 현기증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한 종류의 제품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는 4~5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수백 가지의 비슷비슷한 물건들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고아고들 또한 흘러넘치고 있다. 오늘날, 마케팅이란 일종의 과장의 기술이 되어버렸다. 마케터들은 새로운 제품이 나왔다고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신제품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우겨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에 변수가 하나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최근에 벌어진 세계적인 경기침체이다. 미국발 경제위기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으로까지 파고들어속, 이제 우리 모두는 어떻게든 혼자서 어려움을 이겨 나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경제위기는 우리 모두를 집단적인 방식으로 몰아대고 있다. 나는 아직도 경제위기가 막 찾아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집값이 폭락하면서, 투자시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동안 내가 부러워마지않았던,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크고 멋진 집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만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기본적인 소비패턴을 바꾸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 사회가 일구어온 성공과 꿈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과소비는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생필품을 살 때에도 신중하게 고민을 해야만 했다. 풍요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풍요의 물질적인 기반이 사라진 것이라기보다, 풍요에 대한 정신적인 안도감이 사라진 것이엇다.

 비즈니스 세계에도 기술적인 측변이 다분히 존재한다. 그러한 측면은 특히, 관찰과 분석 활동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여기서 바로 마케터의 존재가 부각된다. 마케터는 자신이 원하든 혹은 원하지 않든, 모든 인간의 욕구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물론 인간의 욕망에는 한계란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거기에는 어느 정도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마케터들 대부분은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소비자들의 욕망과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비즈니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풍요로운 시대에 대한 수많은 분석과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 사회는 그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쇼핑몰만 둘러보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이싿.

 로큰롤이 그랬던 것처럼, 마케팅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허풍은 당연한 것쯤으로 여겨졌다. 표절도 별로 문제될 게 없었다. 전형적인 멜로디와 리듬만으로 비슷비슷한 노래를 만들고 나서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매너를 보여주기만 하면 관중들이 열광을 했던 것처럼, 마케터들은 특별한 아이디어 없이도 얼마든지 쉽게 소비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조금의 속임수는 그냥 애교로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록밴드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이, 마케터들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특히 최근에 풍요의 시대가 급속히 저물어가면서, 소비자들은 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졌다. 예전의 시끄럽고 화려한 마케팅은 더는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마케터들은 남들과 비슷한 전략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비즈니스 세계의 사람들은 이제 뭔자 ‘다른different'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절실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 책의 목표는, 오늘날 비즈니스 세계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추구해 나가야 할 ’다름difference'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동일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차별화의 존재를 발견해 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고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혁신적인 기업 사례들을 살펴볼 것이다. 오늘날 비즈니스 세계에는,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브랜드를 구축해나가는 용감무쌍한 기업들이 드물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보다 앞서, 나는 비즈니스 전문가, 그중에서 특히 기업의 마케터들이 그동안 고집해 왔던 고정관념들을 가장 먼저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조하듯이, 배우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것이 더 힘들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새로운 소비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한다면, 그리고 비즈니스 세계의 미래를 열어가고자 한다면, 고정관념의 한계를 과감히 넘어서야만 한다.

 작년에 둘재 아들이 2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형과 마찬가지로 매주 새로운 시를 숙제로 받아가지고 왔다. 나는 도다시 매일 밤 아들 앞에서 시를 낭독해야 했다. 말 그대로 나는 데자뷰 현상을 체험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예전 같지 않았다. 시를 암송한다는 것은, 그 속에 담겨진 소중한 의미를 잃어버린 채 그냥 기계적으로 읊어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문직 여성인 내 친구 얘기를 잠깐 해 보자. 그녀는 웬만한 경영서의 내용은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녀의 말에 쉽게 동의할 것이다. 실제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경영서들은 아주 많이 나와 있다. 그러한 책들은 지하철 노선도처럼 자세한 정보는 가능한 제외하고, 중요한 개념들만 압축해서 설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압축에는 항상 손실이 다르기 마련이다. 예일 대학에서 정보전달을 연구하고 있는 으데워드 퍼프트 교수는 ‘파워포인트의 인식유형’이라는 논문을 통해, 프리젠테이션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정보전달의 특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여기서 퍼프트 교수는 과잉단순화와 형식적 표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만약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얘기한다면,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파티에 와 있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할 것이다.

 대학생 시절, 나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의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과 강의 그리고 연구에 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어찌 보면 두서없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저자는 분명 다양한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일관적인 메시지를 조금씩 엮어나가고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을 즈음, 독자들은 저자가 이 책에서 과학적 원칙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파인만은 여기서 정보를 전달하는 두 가지 접근방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첫째, ‘파워포인트적인 방식’이다. 파워포인트적인 방식은 세부적인 사항들을 계속적으로 제거해 나가서, 결국 그 핵심만 남기는 방식을 말한다. 두 번째는 이와 정반대의 접근방식이다. 이는 현상의 복잡성은 그대로 놓아두고, 관찰자의 시선만 이동시키는 ‘시선 바꾸기’방식이다. 시선 바꾸기 방식은 세부적인 정보를 제거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관점을 이동하면서 새롭게 해석을 시도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 책에서 파인만은 후자의 방식을 선택한다. 그는 이러한 접근방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기워나가면서 커다란 융단 하나를 완성하고 있다. 파인만은 정말로 수많은 천조각들을 가지고 화려하고 치밀하고 완벽한 작품 하나를 만들어낸 것이다. 파인만은 언젠가 꼭 한 번 저녁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드는 사람이다!

 터프트와 파인만의 책 이외에도, 나는 여러 다른 책들로부터 이 책을 써나가기 위한 접근방식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 의사이자 저자인 아툴 가완디가 쓴, 미국 의료 시스템에 관한 두 권의 책을 들 수 있다. 이 책들은 모두 조합과 숙성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가완디는 개인적인 부분과 전문적인 부분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차분하게, 도 다른 때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간다. 나는 가완디의 책을 통해 미국의 의료 시스템을 예전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다음으로 존 스틸고 교수의 ‘외면에 마술이 존재한다’라는 책을 들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현대건축에 대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원 시절에 읽었던 돈 노먼의 ‘일상용품 디자인’이라는 책을 통해, 기술과 기능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위의 책들은 모두 저마다 서로 다른 접근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학문적인 주제를 일상생활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학문적인 내용들을 단순화하려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더 풍부하고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고 했다. 이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를 설명하는 방식은,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캘빈 트릴린이 음식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 의료 시스템, 건축, 과학기술 분야에서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전문 분야가 더 큰 세상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이 쓴 책은 얼핏 보기에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결국 분명한 하나의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쩐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특히 현학적인 표현의 비효율성에 각별히 주의하고 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푸어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주장이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 있다느 ㄴ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의 책은 독자들에게 빛나는 영감을 가져다준다. 저자들은 자신들이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결론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들 모두는 철저하게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핵심적인 교훈을 끄집어 내고 있다. 이들의 날카로운 눈은 자갈밭에서 옥석을 가려낸다. 보석을 발견하는 순간, 그들은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한 진실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하고 풍부하게 설명하낟. 만약 학문이라는 것이 대화의 형식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면, 이들은 분명 가장 유능한 학자로 추앙을 받게 될 것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낯선 어휘의 그물들을 과감하게 던지면서, 진리의 물고기를 힘차게 몰고 나가는 타고난 이야기꾼들이다.

 오늘날 비즈니스 세계에서 마케팅은 배경음악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소비하고 욕망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들 속에서, 마케팅은 이제 리므과 패턴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 시장을 바라보았던 일차원적인 접근방식으로는 이러한 마케팅의 존재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입체적인 접근방식을 취하고 이싿. 그리고 모순적인 개념들을 조금은 복잡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잇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나는 학생들에게 마케팅이란 ‘기업’과 ‘실제의 사람’이 만나는 공간에서만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실제의 사람’들은 기업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 속의 사람들은 절대로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알고리즘이나 생산공정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현실 속의 소비자들은 비즈니스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독특하고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그리고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바로 현실 속의 소비자들이 가지고 잇는 사고바식과 태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는 조금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이유로 더욱 창조적일 수 있으며, 또한 그 속에서 여러분은 친숙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접근방식이 분명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과 행동들은 결코 논리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일상 속의 생각들은 보잡하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무넹 우리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비즈니스 세계의 진실 역시 복잡하고 모순투성이인 길을 걸어가지 않고서는 발견할 수 없는 법이다.

 마지막으로, 한 학생이 내 수업에 대해 했던 말을 소개한다. “교수님의 강의가 다른 수업들과 다른 점은,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교수님의 강의는, 경영학 수업을 가장한, ‘우리’ 자신을 위한 강의입니다.”

 나는 이 책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디퍼런트’는 경영서를 가장한,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지침서이다.

Books: '발견하는 즐거움'(中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 - 리처드 파인만


*리처드 파인만의 '발견하는 즐거움' 중에서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

과학과 종교의 양립이 왜 쉽지 않은가? 그리고 모순 없는 양립에 이르려는 시도는 가치 있는 일인가?를 다루려고 한다.

신이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신은 일종의 인격신이다. 그러니까 서구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으로서, 기도의 대상이고,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을 도덕적으로 이끌어주는 존재다.

더 깊이 탐구할수록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과학이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해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의 확실성 정도를 진술할 뿐이다.

과학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수록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또는 저것의 가능성이 더하거나 덜하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지식의 진보를 위해 우리는 항상 겸허해야 하며,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용납해야 한다. 우리가 호기심을 지니고 탐구하는 것은 답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무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주 값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이 반드시 옳은 결정이라는 것을 알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종교와 과학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거의 확신하며 조금 의심한다” 이것은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전혀 다르다.
일단 절대성을 제거하고 불확실성의 정도 문제로 넘어가게 되면,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많은 경우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거의 확실히 옳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을 넘어서서 우주를 묵상한다는 것, 인간이 없는 우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다. 기나긴 우주 역사의 거의 모든 시간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광활한 우주의 거의 모든 공간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침내 이런 객관적인 관점을 얻게 될 때, 물질의 신비와 장엄함을 음미하게 되고, 이어 객관적인 시선을 인간에게 돌려 인간을 물질처럼 보게 되고, 나아가 생명을 우주의 가장 심오한 신비로 보게 되고, 글로 씌어진 적이 별로 없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은 대개 한바탕 웃음으로 끝난다. 이 웃음은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질없음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관점은 경외와 신비로 끝난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언저리에서 망연자실한다. 그러나 이 경외와 신비는 너무나 심오하고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우주가 단지 인간의 선악 투쟁을 지켜보기 위한 신의 무대로 배열되었을 뿐이라는 이론은 부적절해 보인다.

도덕적 개념이 신과 결부될 필요가 없는 독자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결국 예수의 신성을 의심하면서도, 이웃이 자기에게 하지 않으면 좋을 것을 이웃에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굳게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적 윤리를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모순도 발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서구 문명은 두 가지 커다란 유산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하나는 과학의 모험 정신, 즉 미지에 대한 모험 정신이다. 미지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대답될 수 없는 우주의 신비는 대답되지 않은 채 남겨둘 필요가 있다. 과학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태도를 필요로 하며, 한마디로 지성인의 겸허함을 필요로 한다. 또 하나의 거대한 유산은 기독교 윤리다. 이 윤리는 사랑에 입각한 행동의 기초가 되며, 인류의 형제애와 개인의 가치, 영혼의 겸허함에 입각한 행동의 기초가 된다.

서구 문명의 두 기둥이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정히 함께 서 있을 수 있도록, 두 기둥을 받쳐줄 영감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일 것이다.


Books: '생각의 탄생' - 로버트 & 미셸 루트번스타인


저자의 말

'창조적 사고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은 통합적이고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따라서 ‘종합적 이해’라는 직물을 짜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지식들이라는 실을 먼저 풀어놓지 않을 수 없다. 전문화 추세가 가속화 되면서 지식은 파편화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작 그것들의 기원이나 의미는 무엇인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거의 파악하지 못한다. 전문적 지식의 양은 늘어나는 데 비해 학문 간의 교류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어 종합적 이해력은 퇴보 일로에 있다. 현대사회는 지식의 풍요 속에서 오히려 암흑기를 맞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오로지 새로운 방식으로 지식을 재통합하고, 이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잇는 신르네상스인을 양성할 때 이겨낼 수 있다.

통합적 이해는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출발점이다.'




*창조를 이끄는 13가지 생각도구


 교육자나 독학자, 부모들이 맡아야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실재와 환상, 이 둘을 재결합하는 일.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방법을 알려준다. 그들이 각자 발견한 것들을 한군데로 모은 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생각의 도구들’인데, 이것이야말로 창조적 이해의 핵심이다. 이 도구들은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그리고 통합이다.

세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처음에는 관찰을 통해 습득된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몸으로 느기는 것들 말이다. 이런 느낌과 감각을 다시 불러내거나 어떤 심상으로 만들어 머릿속에 떠올리는 능력이 바로 형상화다. 실제로 과학자나 화가, 음악가들은 그들이 실제로 보지 못한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아직 세상에 나온 적이 없는 노래나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한번도 만진 적 없는 어떤 것들의 질감을 느길 수 있다.

 그런데 이 감각적 경험과 감각적 형상은 너무 많고 복잡하기 때문에 창조적인 사람들은 필수적인 생각도구로서 추상화를 활용한다. 피카소 같은 화가건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건 헤밍웨이 같은 작가건 간에 그들은 복잡한 사물들을 단순한 몇 가지 원칙들로 줄여나갔는데, 추상화는 바로 이것을 일컫는다.

 이 단순화는 자주 패턴화와 짝을 이룬다. 이 패턴화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패턴인식은 자연의 법칙과 수학의 구조를 발견하는 일뿐만 아니라 언어와 춤, 음악의 운율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림의 경우 화가의 형식적 의도를 감지하는 일과 가ᅟᅩᆫ련되어 있다. 패턴을 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첫 걸음이다. 음악이나 미술, 공학, 혹은 무용, 그 어떤 분야이건 간에 기발한 패턴을 형성한다는 것은 단순한 요소들을 예상 외의 방법으로 조합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패턴이 스스로 패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게다가 패턴 속에 들어 있는 패턴을 인식한다는 것은 곧 유추로 이어진다. 명백히 달라 보이는 두 개의 사물이 중요한 특질과 기능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과 예술작품, 불후의 과학이론, 공학적 발명을 이루어내는 일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생각도구들은 언어와 상징 이전의 것이다. 바로 몸으로 생각하기가 정확히 그런 것인데, 생각이란 것이 먼저 감각과 근육, 힘줄과 피부를 타고 느김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말과 공식을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수많은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의 덩어리가 솟아오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몸의 감각과 근육의 움직임, 감정들은 보다 정련된 사고의 단계로 뛰어오르게 하는 도약대 역할을 한다. 운동선수와 음악가는 동작의 느낌을 상상하고, 물리학자와 미술가는몸 안에서 전자나나무의 움직임과 긴장을 감지한다. 감정이입은 몸으로 생각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많은 창조적인 사람들은 뭔가를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을 잊는다고 말한다. ‘나’를 잊조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배우들은 맡은 배역을 자신의 일부로 만든다. 과학자나 의사, 화가 역시 배우들처럼 일종의 연기를 통해 다른 사람이나 동물, 나무, 전자, 별이 된다. 생각도구 가운데 공간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다차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차원적 사고란 어떤 사물을 평면으로부터 끌어내어 3차원 이상의 세계로, 지구로부터 우주로, 시간을 통과하여 심지어 다른 세계로 옮길 수도 있는 상상력을 일컫는다. 이것은 생각도구들 중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도구지만 공학, 조각, 시각예술, 의학, 수학, 천문학분야에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평면적 차원의 ‘그림’을 보다 높은 차원 속으로 옮겨 해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개괄한 생각도구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다. 그중 어떤 것도 다른 것들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몸으로 생각하기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 유추는 패턴인식과 패턴형성에 의지하고 있다. 패턴화는 다시 관찬ㄹ에 의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고 실습하는 과정에서는 각각의 생각도구들을 분리할 수 있다.

 그 밖의 생각도구들은 보다 높은 단계의 것들로서, 기본적인 생각도구들을 기반으로 통합한 것들이다. 어떤 대상과 개념을 모형으로 만드는 것은 다차원적 사고, 추상화, 유추, 손재주의 결합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시인과 작가들은 앞세대의 작가들이 남긴 전범을 보면서 장르의 패턴을 익히낟.

 화가나 조각가들은 대형작품을 제작하는 준비단계로 스케치를 하거나 작은 모형을 만든다. 무용수들은 일반 사람들의 동작에서 안무를 뽑아낸다. 의사들은 특수한 인체모형을 놓고 시술과정을 배운다. 엔지니어들은 작업모형을 다루면서 설계를 검토하낟.

 놀이는 도 다른 통합적인 생각도구로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역할 연기와 모형 만들기 등의 생각도구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놀이는 작업에 즐거움을 불어넣어주며 관습적인 절차나 목표, 게임의 법칙 등을 크게 중시하지 않느낟.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기존 과학과 예술, 기술의 한계에 장난스럽게 도전한다는 것은 기발한 생각들이 탄생하는 가장 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변형은 하나의 생각도구와 다른 생각도구 사이, 그리고 생각의 도구들과 공식적인 의사전달언어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환과정이다. 생활에서 우리는 마음이나 몸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을 통해 문제를 포착한다. 그러나 그 해결책에 대해서는 말이나 동작, 혹은 방정식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표현해야 하낟. 느낌에서 의사전달로 이행하는 데에는 거쳐야 할 일련의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문제를 이미지나 모형으로 변환하고, 면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패턴을 찾아내고, 패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추상화하여 그것을 다시 모형으로 만든다. 그런 다음 감정이입과 역할 연기를 통해 다양한 해결책들을 모색하며 ‘놀아’본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장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언어’를 찾는다. 변형은 나머지 다른 생각도구들을 한데 엮어서 하나로 기능하는 전체로 만들고 가각의 기술을 다른 기술들과 상호접합시킨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통합은 지금까지 설명한 생각도구들의 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것은 항상 통합적이며 많은 경험의 방식들을 결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통합에는 두 개의 기본적인 요소가 있다. 하나는 공감각으로, 이는 동시에 복수적으로 감각하는 것을 일컫는 신경학적·예술론적 용어다. 어떤 소리는 색채를 유발하며 어떤 맛은 촉각이나 기억을 불러낸다. 통합은 지식의 통합을 전제로 한다. 통합된 지식 안에서는 관찰, 형상화, 감정이입과 기타 생각도구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한다. 이 작용은 앞서 설명한 변형의 경우에서처럼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면 기억, 지식, 상상, 느낌 등 모든 것들이 따로따로가 아닌 전체로, 그리고 몸을 통해서 이해된다. 이 단계에서 토크를 숫자로 표시하는 방정식이 실제로 문을 열 때 손에 느껴지는 회전력으로 직접 다가온다. 우리는 이것을 몸과 마음, 감각과 분별력을 이어주는 ‘통합적 이해’, 혹은 종합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생각도구를 가르치는 일의 최종목표라고 할 수 있다.

2013-08-05

Lecture: (세.바.시) 김진혁 EBS PD - '소통하려다 불통이 되는 몇 가지 이유'




'우연히 들어가 본 동대문운동장은 '지식채널e'를 연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울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전혀 알지 못했던 그들만의 세계를 보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소통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는 큰 화두지만 여전히 소통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 김진혁 EBS PD

EBS: 지식채널e - '눈물의 룰라' 1부, 2부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이야기)




눈물의 룰라 1부 
EBS 지식채널e, Knowledge of the channel e, 20110118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
구두닦이, 선반공 출신의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외국의 어떤 대통령 이야기.






눈물의 룰라 2부
EBS 지식채널e, Knowledge of the channel e, 20110125

룰라가 대통령이 되고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가난구제와 교육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조건으로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인 
'볼사 파밀리아'는 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