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06
Books: '발견하는 즐거움'(中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 - 리처드 파인만
*리처드 파인만의 '발견하는 즐거움' 중에서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
과학과 종교의 양립이 왜 쉽지 않은가? 그리고 모순 없는 양립에 이르려는 시도는 가치 있는 일인가?를 다루려고 한다.
신이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신은 일종의 인격신이다. 그러니까 서구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으로서, 기도의 대상이고,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을 도덕적으로 이끌어주는 존재다.
더 깊이 탐구할수록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과학이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해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의 확실성 정도를 진술할 뿐이다.
과학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수록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또는 저것의 가능성이 더하거나 덜하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지식의 진보를 위해 우리는 항상 겸허해야 하며,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용납해야 한다. 우리가 호기심을 지니고 탐구하는 것은 답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무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주 값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이 반드시 옳은 결정이라는 것을 알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종교와 과학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거의 확신하며 조금 의심한다” 이것은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전혀 다르다.
일단 절대성을 제거하고 불확실성의 정도 문제로 넘어가게 되면,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많은 경우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거의 확실히 옳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을 넘어서서 우주를 묵상한다는 것, 인간이 없는 우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다. 기나긴 우주 역사의 거의 모든 시간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광활한 우주의 거의 모든 공간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침내 이런 객관적인 관점을 얻게 될 때, 물질의 신비와 장엄함을 음미하게 되고, 이어 객관적인 시선을 인간에게 돌려 인간을 물질처럼 보게 되고, 나아가 생명을 우주의 가장 심오한 신비로 보게 되고, 글로 씌어진 적이 별로 없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은 대개 한바탕 웃음으로 끝난다. 이 웃음은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질없음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관점은 경외와 신비로 끝난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언저리에서 망연자실한다. 그러나 이 경외와 신비는 너무나 심오하고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우주가 단지 인간의 선악 투쟁을 지켜보기 위한 신의 무대로 배열되었을 뿐이라는 이론은 부적절해 보인다.
도덕적 개념이 신과 결부될 필요가 없는 독자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결국 예수의 신성을 의심하면서도, 이웃이 자기에게 하지 않으면 좋을 것을 이웃에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굳게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적 윤리를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모순도 발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서구 문명은 두 가지 커다란 유산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하나는 과학의 모험 정신, 즉 미지에 대한 모험 정신이다. 미지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대답될 수 없는 우주의 신비는 대답되지 않은 채 남겨둘 필요가 있다. 과학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태도를 필요로 하며, 한마디로 지성인의 겸허함을 필요로 한다. 또 하나의 거대한 유산은 기독교 윤리다. 이 윤리는 사랑에 입각한 행동의 기초가 되며, 인류의 형제애와 개인의 가치, 영혼의 겸허함에 입각한 행동의 기초가 된다.
서구 문명의 두 기둥이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정히 함께 서 있을 수 있도록, 두 기둥을 받쳐줄 영감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일 것이다.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