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시인이 엮은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시집에 대한 해설
시집 해설
- 류시화
치유와 깨달음의 시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한 편의 시가 보태지면 세상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다. 좋은 시는 삶의 방식과 의미를 바꿔 놓으며,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시는 인간 영혼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그 상처와 깨달음을. 그것이 시가 가진 친유의 힘이다. 우리는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 것이다.
얼음을 만질 때 우리 손에 느껴지는 것은 다름 아닌 불이다. 상처받은 자기 자신에게 손을 내밀라. 그리고 그 얼음과 불을 동시에 만지라. 시는 추위를 녹이는 불, 길 잃은 자를 안내하는 밧줄, 배고픈 자를 위한 빵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보라.
사랑하라.
놓지 마라.
- 더글러스 던
시는 인간 영혼의 목소리다. 그 영혼의 목소리는 속삭이고, 노래한다.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삶을 멈추고 듣는 것’이 곧 시다. 시는 인간 영혼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그 상처와 깨달음을. 그것이 시가 가진 치유의 힘이다.
좋은 시는 치유의 힘, 재생의 역할을 하며 읽는 이의 영혼의 심층부에 가닿는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나만의 신비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아이들과 놀 때나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내가 혼자 뒷산이나 마을 앞 강으로 걸어나가면 갑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내면 세계였다. 강에 자란 휘어진 풀들, 수면에 비친 영혼, 서리 내린 들판, 작고 흐니 돌멩이, 무덤가에 죽어 있는 풀벌레 등이 내게 무엇인가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일상적인 언어로 옮기는 순간, 본래의 색채를 잃고 퇴색하곤 했다.
우리의 육체적인 존재가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며 이 지구 차원에서 육체적인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삶은 영혼 여행의 일부다.
시는 삶에 대해 인간의 가슴에 던지는 질문이다. 시는 진정한 삶을 살도록 자극한다.
‘자신의 삶을 살라’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사용한 언어들이 ‘다른 어떤 장소’에서 온 언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언어들은 내가, 그리고 사람들이 주위에서 늘 쓰는 그런 언어가 아니었다. 훗날 나는 그것이 영혼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렸다.
시를 쓰면서 나는 내 자신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때로 우리는 삶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삶에 상처받는 사람들이다. 상처로 마음을 닫는다면, 그것은 상처 준 이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삶과의 단절이고, 고립이다. 고립은 서서히 영혼을 시들게 한다.
상처받은 자신을 초대하라. 그리고 함께 춤추라. 그것이 치유니까.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의 ‘시작 수첩’
‘시는 단어들이 아니라 추위를 녹이는 불, 길 잃은 자를 안내하는 밧줄, 배고픈 자를 위한 빵이다.’
자비의 어원은 ‘함께 상처를 나눈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 속에 자연히 존재하는 자비의 마음. 보리심의 깨어남. 다른 사람들이 내면에서는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티베트의 전통적인 수행법 통렌은 그런 자비심의 극치를 보여준다. 수행자는 깊은 숨을 들이쉬면서 세상의 고통과 불행과 부정적인 요소들을 다 자기 안으로 흡수한다고 상상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온정과 자비와 빛 에너지를 세상에 내보낸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시를 읽고 쓰는 행위는 바로 이 통렌과 같다.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왜냐하면 상처받은 것은 영혼이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상처받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 존재는 더 큰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지하게 시를 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열여덟 살 때 릴케의<젊은 시인에게 보내는편지>를 일고 나서였다. 나는 밤을 꼬박 새우며 그 책을 다 읽었고, 새벽이 밝아왔을 때 시인의 사람이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시인은 상처받은 치유자이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마음 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한결같이
삶은 생존하는 것 이삼임을 일깨우고 있다. 좋은 시는 치유의 힘, 재생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자문하게 한다. 좋은 시는 어느날 문득 자신과 세상을 보는 방식을 새롭게 한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를 보는 눈은 감상적인 눈이 아니라 불처럼 타오르는 눈이어야 한다. 모든 비본질적인 것과 불순물들을 다 태워 버리는.
시가 기적의 치유제는 아니지만, 읽는 이의 영혼의 심층부에 가닿는다. 그 영혼은 삶에서 받은 상처로 위축되고 떨고 있지만, 상처받는 일 때문에 사랑을 포기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이 삶 속에 태어났다면, 당신은 거친 세파를 견딜 각오를 해야만 한다. 온갖 불필요한 충고와 소음을 들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수많은 병고와 사건이 밀려오리라. 그것이 삶이다. 하지만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지켜낼 만반의 준비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랑이 당신을 정화하리라는 것도.
중고등학교시절. 교사들이 분석해 주는 시를 들으면서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시를 곤충처럼 날개를 찢고, 더듬이를 잘게 부수고, 등껍질을 다 벗겨내 마침내 죽게 만드는 행위임을 느꼈다. 훗날 내 손으로 직접 시집을 사들고 와서 혼자만의 방에서 조용히 소리 내어 시를 읽었을 때, 비로소 시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 속으로 들어가 그 시에 의해 감정이 순화되고 변화하는 일이다.
시가 영혼의 양식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의 세계로의 여행.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삶을 더 가치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충분히 살아내야 한다.
오늘날 매스커뮤니티 등에 의해 언어가 오염되고 본래의 의미로부터 멀어졌지만,
시는 여전히 가장 정직하고 순수한 언어로 남아 있다.
시를 잃는다면 우리는 언어의 거의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당신이 단 한 편의 시라도 외운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에라도 당신을 순수한 존재의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다.
당신이 얼마 동안 삶을 살았는가에 상관없이, 나는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당신의 가슴에 가닿으리라고 믿는다.
영혼의 방향과 삶의 지혜를 선물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읽어 줘야 할 것은 결국 시가 아닌가. 삶의 시......
이 시집이 당신 안에 있는 사랑을 일깨우고 깊어지게 하기를 나는 바란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 타인과 세상을 사랑하기를.
이 시집뿐 아니라 결국 모든 책의 저자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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