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02

'김훈과 만나다' - 김훈 작가의 현충사 강연회 기록 (`12.5.26)


김훈과 만나다


- 김훈 작가('칼의 노래' 저자) 현충사 고택정담 강연회 기록 (2012.5.26)






선생님께서도 일기를 쓰십니까?


- 특별한 날들엔은 일기를 쓰죠. 일기는 사실과 자신의 진실성을 기록하는 것이죠. 최근 OO원에 방문했을 때도 일기를 썼어요. (어떤 사회복지시설을 말씀하신 것 같았다 - 글쓴이 주) 오늘도 돌아가면 일기를 쓰게 될 것 같아요.


충무공께서 사셨던 시대나 김훈 선생님께서 사셨던 60년대는 개인이 사회로부터 수동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과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더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강연 중 말씀하셨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능동적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역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 우리의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배후에 숨겨진 것들이 있어요.  약육강식, 야만성, 권력.. 이런 것들이죠. 이런 것들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답변은 '김훈' 다운 답변으로 느껴졌다. 그 어두운 것들을 들여봐야 한다는 건,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펼쳐지는 흐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그 흐름 속에 내가 듣고자 한 것들이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을 지적해준 것 같았다. - 글쓴이 주)

- 강연회 중 '작가와의 질의응답' 시간에
(본인 질문, 김훈 작가 답변)







김훈의 청춘을 변화시킨 한 권의 책, '난중일기'

이날 강연회에서 김훈 작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토대로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고려대 영문과 재학시절 접한 '난중일기' 속에서는 자신히 익히 알고 있던 영미시(워즈워즈,바이런 등) 속 심오한 철학,논리,사유,신의섭리 등은 없었고, 낭만도 희망도 없는 오로지 고통과 절망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그것을 돌파해가는 한 인간의 진실성을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1960년대 한국의) 인간의 야만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내면에 깊이 다가옴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김훈의 청춘을 변화 시킨 한 권의 책이 었다.

그는 대학 시절에 소설을 쓰는 것과 같은 몽환적이고 낭만적은 꿈은 가져본 적이 없었으며,
밥을 제대로 먹고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소망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돈 없는 애들은 안 가르치는 나라'라고 말하며, 자신은 그 당시 가정형편상 대학을 마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그 당시의 청년들처럼 TV나 냉장고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진로를 택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현실적인 소망을 갖고 있었지만 또다른 현실에 부딪히는 아픈 경험을 했다. 그리고 군생활을 통해 서울출신으로써 느껴보지 못했던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쌓는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젊은 시절에, 자신의 언어를 장악하는 날, 언젠가 이순신의 내면에 대해 말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30여년이 지난 어느날 그는 자료조사와 현지답사 등을 하며 그 글을 써내려 가고 있었다고 말한다. 









김훈의 목소리로 듣는 '난중일기'

"이순신은 자기 부하를 많이 죽였고, 주저 하지 않았다.
전쟁기간 행해진 군법은 130회, 처형은 28회였다.
이 부대는 다양한 놈들이 다 있는 인간의 한 무리였다.
탈영, 군량도둑, 유언비어날포, 민간인 강간,약탈, 전투 중 도망 등...

다만, 그가 군법을 행할 때 그는 자비와 무자비의 경계에 있지 않았다. 
그것을 넘어서서 그는 자신의 일을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육,해전에서 전패하고 있던 때에, 옥포해전 승리는 이순신이 처음으로 조국에 안겨준 승리였다.
그 당시의 기록에서는 엄격한 신분사회였지만 그 속의 하층계급이었던 부하들의 사소한 공을 챙겨주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비로움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배의 좌현과 우현에 각각 소속되어 자기 역할을 하던, 심마니 김막쇠와 땅꾼 김개똥이 죽어나가자 출신과 나이, 사망사유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조정에 보상을 요구했다는 기록을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개 하층계급 부하의 죽음에 대한 이순신의 조치이다.

적 앞에서는 언제나 용맹했고 백성 앞에서는 한 없이 온순했던 
하나의 인격, 한 명의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남 우수영 명량에서 치러졌던 명량해전, 
아군 12척의 배와 적군 130척(사실 그 뒤에 100척이 더 있었다)의 전투를 기록한 일기를 보면, 전쟁에 임하는 내면의 진솔한 두려움과 함께 그러나 부하들 앞에서는 언제나 낙관적 태도를 보이며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했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인간을 전환시켜 쓸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일기에 마저도 드러나지 않는 이순신의 '침묵'

"임진왜란당시 선조 임금은 나라를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 신의주로 가고 있었다. 백성들은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 이때 이순신은 연전연승을 하며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임금에게 썩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얼마후 이순신의 몸은 고문을 견뎌야 했고, 계급장을 떼이고 무등병으로 전락하는 불명예를 겪어야 했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 점에 있어 단 한마디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했다.
일기는 물론이고, 편지에서나, 취중에서도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김훈 작가는 이러한 '침묵'을 소설에서 잘 표현할 수 없었다고, 감히 그럴 수 없었다고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소설은 미완성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그 침묵 속에서 이순신의 무서운 내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추측될 수 있는 문신 정치적 권력에 대한 증오와 원한, 적개심을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는 그 무서운 내면, 그리고 강인함.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치밀하고 꼼꼼한 기록, 그리고 기록자 이순신

'병신년 1월 6일. 오수가 청어 1301마리, OO 781마리를 잡아왔고, 말려서 건어물로 만들었다.'

장군은 자신의 일기에 잡아온 물고기의 마릿수를 일의자리 까지.. 세세히 기록했다. 이 얼마나 치밀하고 꼼꼼한지.. (방청석 웃음)


'1월 7일. 부하 장군 A가 다른 부하 장군 B의 애인을 데리고 술자리에서 놀았다'

장군은 부대내에서 인간관계가 친밀했음을 보여준다. 누가 누구 애인인지 까지도 훤히 알아볼 수 있엇다. (방청석 웃음)


한편 그가 백의종군 할 때 기록한 피난민들의 함성은 슬픈 대목이다.


그리고 그는 간결하고 주어와 동사로 구성된 단순한 문장으로 기록을 남겼다.


'9월 2일 맑음.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

자기 바로 아래에 있는 부대 초부지휘관이 도망간 것인데 저 기록이 전부다. (방청석 웃음)


'9월 8일 맑음. 적선은 오지 않았다'

만반의 준비를 다 해두었는데, 적선은 오지 않았다.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던 해의 기록들을 보면...

'무술년 10월 7일 맑음. 별사위 송한연이 쌀 네 가마, 조 한섬, 꿀 석되. 김태종이 쌀 두 섬을  군량미로 가져왔다.'

군대의 규모를 보자면 누구입에 제대로 풀칠도 못 할 극히 적은 양이었다. 부대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하는 모습에서 장군의 겸손함을 볼 수 있다.


장군이 전사전에 남긴 마지막 일기는 다음과 같다.
'11월 17일. OO와 조효열이 군량을 가득채운 일본의 배 두 선을 빼앗아 돌아오던 중, 명나라의 배에 그것을 다시 빼았겼다.'


장군은 자신의 일기에 '사실'들을 적었다.

조정의 시기로 감옥에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나오던 날 그가 남긴 일기다.

'4월 1일 맑음. 오늘 옥문을 나왔다. ... (영의정이 보내온) 종의 집에 가서 묵었다.'

'4월 2일. 어두울 무렵에 영의정(유성용)이 와서 닭이 울 무렵에 돌아갔다'






김훈 작가와의 질의응답


강연 마지막 무렵에 나를 포함해 6명 정도가 공개 질의와 답변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중에서 대학생들이 질문한 두 가지 내용을 간단히 적어본다.


문화재청 대학생 기자로 취재나온 한 여학생의 질문.
김훈 선생님의 소설은 대중에게 친근하지 않은 어휘로 다가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나도 잘 모르겠어요. (방청객 웃음) 
내가 글로써 표현하는 내면의 억눌림, 갈등 등이 독자들 내면에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대학생인 한 남학생의 질문.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가 젊었을 때, 20대 초반에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탐험하며 남긴 기록인데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시각'이고 '본 것 보다 보지 않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강연회 참석 후기

 보통 김훈 작가의 책이나 글을 접하게 되면 그의 절제된 언어와 냉정함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인터뷰나 강연등을 같이 고려해보면, 그가 순수함과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매번 되풀이 되듯 그가 말하는 인간 사회의 '약육강식'과 같은 단어만 놓고 본다하여도, 정작 강자는 약육강식과 같은 것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야만성','권력' 등과 함께 그것을 자신의 소설이나 글 속에 담아내는데, 그게 절제되어 펼쳐지는 그의 언어다. 그것은 냉정하지만 현실을 눈앞에 여실히 보여주려는 노력이다.

나는 김훈 작가가 보여주는 '사실'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청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즉 다시 말해 아직 우리 사회가 성취하지 못한 것, 더 좋은 사회를 위해 이루어 내야 할 것에 관심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은 오늘 강연에서도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늘 그가 할 수 있는 말들, 즉 경험으로 내면화한 것들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오늘 이 곳 현충사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유일하게 '침묵'하고 간 것도, 그곳에 있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남기고 간것도... 그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진제공: 현충사 관리사무소


2012.6.2
김홍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