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로 여행기 및 사진들
Rail-ro raised me up
(내일로는 나를 성장시켰다)
진실함, 배움, 우정, 사랑... 내가 좋아하는 것들
두려움, 순조롭지 않음, 물질적 부족함... 때론 나를 뒷걸음질 치게 하는 것들
내일로는 이 두 가지로 엮인 물결위에 끊임없이 나를 올려두고 담금질했다.
한 번의 물결에 오만할 때 또 다른 물결로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또 하나의 물결에 눈시울 붉힐 때 으레 맑고 투박한 물결로 나를 어루만졌다.
내 눈 속에 그 물결들이 남겨 놓은 흑백의 잔상을 되짚어 본다.
첫 날
게으름과 서투름 탓에 배낭을 좀 더 꼼꼼히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라도 재차 삼차 열심히 했다.
청주역이 새해 첫 인사를 나에게 건넸고,
나는 역 내 자판기의 배를 불러주며 화답했다.
그 이후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안내원에게 말을 건넸고,
내일로 티켓과 전국철도노선도 사본 한 장을 되돌려 받았다.
티켓은 일주일간의 자유를 약속했으나,
철도노선은 나의 게으름과 서투름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만들었다.
역 내 대기석에 짐을 내려놓고 앉아 펜을 들었다.
노선위에, 나만이 알아 볼 수 밖에 없는 그림을 그려나갔다
이 그림이 이후 나의 일주일을 좌지우지 했고,
결국에 나는 그것이 잘~ 그린 그림이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위의 사진인데...
여행중에 별표와 색칠을 무던히도 했기 때문에 이해는 불가능하겠지만,
철도 노선이구나 정도는 알 수 있다.
이 노선 위의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네 번의 큰 발걸음이 필요했고, 지금 이 여행기는 그 첫 번째 발걸음에 대한 것이다.
나의 글이라는 레일을 따라 '전라도'로 내딘 그 첫 발걸음 따라가 본다.
그 중에서도 우선은 전주.
둘째날
오전
비빔밥의 원조, 전라도 최고의 역사 도시, 조선 왕조의 본가, 고풍스런 한옥마을...
그리고 그것들을 휘감고 있는 신. 년. 한. 파.
전주를 둘러보는 오전 내내 추위의 장막은 걷히지 않았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 하나라는 전동성당,
조선 왕조의 시조가 묻혀있는 경기전,
블럭을 이루며 정갈히 자리잡고, 저마다 머리에 블럭(기와)을 얹고있는 고풍스런 한옥마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무모하게도 그것들을 감싼 장막에 손을 댔고,
내 손끝의 미미한 온기가 겨울 장막의 살얼음을 녹여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한 성인의 자비와 사랑이, 왕조의 기상이, 장인들의 열정이 불타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후
노선 위의 그림에는 별들이 몇 개 수놓아져 있는데,
준비를 더욱 더 단단히 해야 할 곳들로,
마음이 똑똑히 그려준 별들이었다.
첫 번째 별을 향해 남원으로 향했다.
사랑의 길이 결코 쉽지 많은 않다는 것을,
그러나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한 여인을 소재로한 조선 최고의 소리가 남원역을 쩌렁였다.
역시 남원다웠다.
온통 흰색으로 덮여져야 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그 고유의 색을 잃지 않고 있었다.
지체하지 않고, 나는 또 하나의 고유의 색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이되면 모든 것들은 자기를 물들이고 있는 색을 밤에게 맡기고 깊은 잠에 빠져들곤 하니까.
어느 날 한 등산인한테 '지리산은 참 여성스러운 산이라던데요?'라고 물었더니
그가 돌려준 대답은, '음,.. 여성스럽다기보다는 어머니 같은 산이지.'
눈이 무릎높이까지 쌓여있었기 때문에, 또 해가 중천을 훑은 후 였기 때문에 부실한 배낭을 갖고서 정상을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둘레길을 택했다. 때론 외딴 표지판 하나에 내 몸을 담보했지만, 지리산의 허리춤은 푸근했다.
늘 몸배바지를 입고, 늘 나를 감싸주던 할머니의 그것과 비슷했다.
둘레길의 시작에서는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아직은 '어머니'는 아니라고 했다.
둘레길의 중간에서는 해발 700m위의 노천주막 하나를 마주했고,
입안을 탁 쏘는 다섯글자를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다. '허 - 브 - 막 - 걸 - 리'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사람을 직접보았는가? 거기 있었다.
해발700m 민박에 '핑크 빛 도는 집'이라는 이름을 붙인 샌스쟁이 아줌마를 직접보았는가? 거기 있었다.
앞면에는 시청 소속 중책을 맡고 있음을 알리며, 뒷면에서는 자기 구둣가게 약도와 전화번호를 찍어놓은 명함을 가진.. 서양화 전공자는?
그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배웅해줬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푸근함을 머금은 채로.
둘레길의 끝에 다다랐을 때, 산은 색을 맡기고 단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 보았다. 뒤늦게 맡겨진 색은 아직 구름 아래 있었다.
그 색은 참으로 크고 푸근했다.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늘 곁에 있었다는 듯이...
나는 시간과 기차를 재촉하지 않는다. 기차와 시간이 나를 재촉한다.
재촉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늘에 순응하며 사는 곳, 이제 그곳을 향해 간다.
셋째날
오전
아침이 밝았다. 어느 곳으로 발길을 향해도 안정감이 든다.
내가 잇는 곳은 어디일까?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에 한 번 갈 수 있는 곳을 간다.
눈길을 느낀다. 나도 옆 좌석을 바라다 본다. 그들의 순수함과 호기심, 여리면서도 강인함이 나의 마음의 눈에 비친다. 우리는 잠시나마 그 눈을 통해 친구가 된 것 같았다.
부지런히 걷는다면 이 곳 전망대에 올라 다음버스가 이곳에 도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청둥오리의 군무와 갈대의 몸짓 현악이 저 멀리 위에서는
마치 아이들의 아장거림과 율동같이 보이는 곳,
자신을 뽐 낼 줄 아는 곳.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만은 고요했다. 도시도 고요했다.
언뜻 든 황량함은 그곳의 것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
그것은 겨울의 것이었다.
만과 도시는 애써 그것을 메꾸지 않았다
그들은 하늘에 순응해 살아가고 있었다.
하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래 놓여있는 것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비로소 '어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느꼈다.
내가 있는 곳이라면,
누군가를 응원하는 곳이라면,
그리고 우리들이 함께하는 곳들이라면 말이다.
오후
이제는 다시 한 번 '큰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때가 왔다.
큰 발걸음인 만큼 가는 길목에서도 큰 시간을 요구했다.
거쳐가야 할 역들이 나의 나이만큼이나 됐다.
그렇다고 이미 먹어버린 나이를 뱉어낼 수도 없었다.
해서 잠시 동안 정신적으로나마 어려지기로 했다.
옆좌석에는 3남매, 앞쪽에는 자매 두 쌍..
내가 있던 객차에는 대부분 코찔질이들 어지럽게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보고 배울 것은 충분했다.
이 지겨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먹고, 자고, 놀고, 구경하고... 먹고, 자고, 놀고, 구경하고...
조금은 움찔했으나, 어느새 그 흐름을 받아들였고 결국은 나쁘지 않은 방법임을 인정했다.
그래서 차후의 '큰 발걸음'들에 있어서도 이 방법들을 때론 충실히 적용하곤 했다.
막내를 놀려대며 놀던 형과 누나, 쎄쎄쎄를 나누던 자매, 객차를 주름잡던 또 다른 자매..
모두에게 감사한다.
나의 나다운 모습도, 언젠가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당신에게도 역시.
2011.1
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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