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자신의 생리적 치부를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는가?
아니 누군가에게 드러낼 필요는 없더라도, 어디까지 스스로 엿볼 수 있는가?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음악과의 조합이 너무 인상적인 덕에, 그 영상이 더욱 선명하게 남아있는 영화가 하나 있다. 개인적으로 오래전에 보았던 <헝거hunger, 2008>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것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고 나서는, 감독이 '몸'을 통해 인간의 바닥을 드러내는데 깊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비교적 최근에 극장에서 상영된 <노예12년12 Years, A Slave, 2013> 를 등으로도 잘 알려진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 감독, 그의 2011년 작 <셰임Shame>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영화다.
<셰임>의 O.S.T 들은 단조롭고 비장하고 또는 웅장한... 그러면서 그 이면에 깊은 고독을 담고 있는 곡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이 곧 <셰임>의 영상이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남자는 간단히 말해 성性에 집착하고 중독이 되어있다. 마치 올무에 발이 걸려 어떻게든 벗어나려 드는 고라니 한마리 같다. 자신의 다리 가죽과 연골이 다 갈려나가고 핏기 어린 뼈가 드러나 있는지도 모르는채 여전히 허공을 향해 발길질을 해대는 것처럼, 주인공은 일견 자기를 자각하는 순간이 오고 그것을 벗어나려고도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업業의 덫 안에서 심신이 찟겨 나가기만 한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가 묶인 덫을 더 확대하고 적나라하게 까서 보여준다. 우발적으로 동성과도 관계를 맺는가 하면, 마지막에는 두 명의 여자를 상대로 하는 베드신을 통해 그의 습관화된 거대한 욕망의 심연을 보여준다. 그때 클로즈업 되는 그의 얼굴에는, 몸이 누리고 있는 모든 즐거움이 사실은 고통임을 말하는 것인 마냥, 치부恥部에 가까운 초췌함이 처량하게도 만연해 있다.
그는 자신의 생리적,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리욕구적 치부를 보는데 결국 자기 시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화의 한 장면.
남자가 밤에 홀로 거리로 나와 조깅한다. 남자의 치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음악과 영상에서 영화 전반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참고로, 블로그에 O.S.T 두 곡을 올려놓았다. 'Unravelling', 'New York, New York'
사내는 식성이 너무나 좋다. 그리고 그것을 타고났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밥을 먹다보면 으레 꼴사납게 먹는다는 소리를 듣곤한다. 시골에서 올라 온 사내는 텃새를 부리며 거리낌없이 말해대는 수도 베이징 사람들, 그들의 인정없는 말에 상처받곤한다. 그리고 분해하고 억울해 한다. 그러나 다행히 그가 또 하나 타고난 것, 즉 기억력이 별로 안좋다는 것에 힘입어 그 말들을 이내 잊곤한다. 그런 연후라 다시 사람들과 밥을 먹을라 치면 자존이나 체면이라는 것은 일절 없는 사람처럼 밥을 먹고 있다. 이런 경우들이 대부분 그들에게 밥을 얻어 먹다가 겪는 경우여서, 이때 가해지는 그들의 모욕은 얻어먹는 밥과 맞물리며 고스란히 감내해야 되는게 되버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모옌 소설의 주인공(그도 이름이 '모옌'이다)에게도 자기를 바꾸어야 겠다고 강하게 마음 먹는 순간이 온다.
'나는 어찌 그리 천박할까, 나는 어찌 그리 주책이 없을까? ... 너는 스스로 항상 너 자신의 신분을 잊고 있다. 너는 시골 출신이고 남들이 너를 근본적으로 안중에 두지도 않으며, 근본적으로 사람으로 보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잊고 있다. ... 이런 도리를 깨닫게 된 뒤, 나는 차라리 굶어죽을지언정 남이 사 주는 것은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럼에도 그는 굴욕을 당하는 경우를 겪게된다. 그는 베이징을 벗어나 고향집에 내려와 있을 때 자신의 어머니를 상대로 모든 것을 고백하고 조언을 구한다.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 사람은 자존심으로 사는 건데...'라고 말하면서도 어떻게 처신 해야할 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그 방법을 차차 따르게 되니 사내는 일단 자신이 음식 앞에서 안달하지 않고 겸양한 태도로 먹을 수 있게됐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고는 이제 모두의 칭찬을 기다린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오는 말들은 억지로 애를 쓴다거나, 본래 생긴대로 노는게 좋다는 등의 여전히 굴욕적인 소리들 뿐이다. 다시 찾아간 어머니는, 운명을 받아들이라 한다. 다만 그렇게 말하면서 지적한다. 즉 사내의 몸이 드러내는 치부 이면의 것을 지적해준다.
'엄마가 볼 때, 네가 하루하루가 다르게 몸이 불어나는 것이 분명한데, 행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몸이 불겠니? 아들아, 너는 지금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몸이 복 속에 있으면서 복을 몰라서야 되겠니?'
어머니의 말을 찬찬히 음미해 보니, 사내는 점점 마음이 평안해졌다. 더 나아가 그는,
'이른바 자존이나 체면이라는 것은 모두 배가 부르고 난 뒤의 일인 것이다. 곧 배고파 죽게 생긴 사람에게는 문둥병 환자가 먹다 남긴 국수조차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물론 굶어죽어도 미국의 구호 양식은 안 먹겠다는 주쯔칭 선생 같은 분도 있지만, 그 분은 위대한 분이고, 나처럼 개돼지 같은 존재는 결단코 자존과 명예 따위의 개소리 놀음으로 자신을 난처하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고 자신의 분명한 새로운 입장을 '스스로'에게 말한다.
<셰임>의 남자가 자신의 치부를 자각하는 데 한계를 갖게 되면서, 그 한계 밖에 놓인 눈(카메라 또는 세상)에 포위되는, 그래서 결코 자신의 치부를 숨기지도 못하게 되는 존재로 남아 있는다면, <먹는 일에 관한 치욕>의 사내는 어느 순간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치부를 알아차린다. 부끄러움과 굴욕 그리고 상처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억지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어머니)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그것을 말하며 자각시킨다.
그 끝에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 즉 체념에 이르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온전히 받아들이는' 순간이 있음으로 해서 그의 발목을 꽉 쥐고 있던 덫이 결국은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임을 알게된다. 그는 치부를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결국은 치부를 벗어던진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사내의 말을 다시 한번 빌리면, 자존과 명예 따위의 개소리 놀음으로 자신을 난처하게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소설의 첫 문단
'남의 음식을 먹는 데 있어 입이 짧아야 한다는 말의 뜻은 아주 분명하다. 단지 이 정도 뜻만 가지고는 뭐 별로 뜻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내 말은 남의 당근 하나 얻어먹고 당한 치욕은 오래된 산삼 한 뿌리를 가지고도 깨끗이 씻어 내기 어렵다는 의미다.'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
사실 소설 전반이 촌철살인의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이 단락은, 식당에서 (프랑스산 혈통있는) 개에게 (그것도 모르고) 고깃조각을 하나 던져 주었다가 쫓겨나다시피해서 뛰쳐나와 숙소로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하는 생각이다.
'모스크바가 눈물을 믿지 않으니 베이징은 더욱 눈물을 믿지 않을 것이다. 베이징은 물이 부족한 도시다. 눈물은 양이 적지만 수돗물이 변해서 된 것이니 함부로 흘리는 것은 각성이 부족하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 외지에서 베이징에 온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울려면 산둥山東(모옌의 고향)에 돌아가서 울어야 한다. 베이징 수돗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베이징에서 울어도 될 것이다. 그러면 울고 싶을 때 울어도 된다.'
*'붉은 수수밭 가족'
나는 중국 영화중에는 장예모 감독의 <붉은 수수밭>(1998년 베를린영화제 대상 황금곰상 수상작)영화 등을 좋아하는데, 이것과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 두 영화의 시나리오를 모옌이 썼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됐다. <붉은 수수밭>시나리오는 자신의 소설 <붉은 수수밭 가족>을 원작으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에는 이 원작을 한번 읽어보고 싶다.
2015.1.13
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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