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내의 몸에서 피멍을 처음으로 본 것은 늦은 오월의 일이었다. 관리실 옆 화단의 모란은 잘린 혀 같은 꽃이파리들을 뚝뚝 뱉어대고, 노인정 어귀의 보도블록에는 문드러진 흰 라일락꽃들이 행인들의 구두밑창에 엉기던 봄날이었다.
정오가 가까웠다.
무른 복숭아 살 같은 햇볕은 무수한 모래먼지며 꽃가루들이 제 몸에 달라붙도록 내버려둔 채 거실 바닥으로 물컹물컹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들큼하고 미지근한 볕을 흰 러닝 셔츠 바람의 등짝으로 받으며, 아내와 나는 말없이 일요일자 조간 신문을 나누어 읽고 있었다.
지나간 한 주는 그 앞의 다른 주들과 마찬가지로 고단하였다. 휴일에만 허락되는 늦은 아침잠에서 나는 수분 전에야 눈을 뜬 참이었다. 모로 누인 노곤한 몸을 이따금씩 뒤틀어 편안한 자세를 만들어가며, 나는 가능한 한 가장 느린 속도로 활자들을 훑어내려 가고 있었다.
"참, 당신이 한 번 봐줄 테야? 왜 이렇게 멍이 가시지 않는지 몰라."
아내의 이야기를 이해했다기보다는 단지 그 어디쯤에서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나는 다소 방심한 시선을 그녀가 있는 쪽으로 쳐들었다.
나는 허리를 곧추세워 앉았다. 신문 갈피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손바닥으로 눈자위를 비볐다. 러닝 셔츠를 브래지어께까지 들추어올린 아내의 등허리와 배에 제법 깊은 멍 자국이 있었다.
"어떻게 다친 거야?"
아내는 잠자코 상체를 외틀더니 주름치마의 뒷지퍼를 엉치뼈 있는 곳까지 내려 보였다. 갓난아이 손바닥만한 연푸른 피멍들이 마치 날염(捺染)한 듯 또렷이 얹혀 있었다.
"응? 어떻게 다친 거냐구?"
재차 다그치는 내 날카로운 목소리가 십팔 평 아파트 거실의 적요를 찢었다.
"몰라... 나도 모르게 어디서 뒹굴었는지...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외려 멍이 점점 커져."
"아프지는 않고?"
아내가 마치 잘못을 들킨 아동처럼 황황히 눈길을 피했으므로, 꾸짖는 듯했던 좀 전의 내 태도가 약간 미안하게 생각되어 나는 말씨를 누그러뜨렸다.
"욱신거리거나 하지는 않는데, 멍든 부분에 감각이 없어. 그게 더 무섭지 뭐야."
죄스러워하던 조금 전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이야기하는 내용에 걸맞지 않게 입가에 생글생글 미소를 띄우더니 아내는 <병원에 가볼까?> 하고 물었다.
문득 나는 서먹서먹한 마음이 되어 아내의 동안(童顔)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사 년째 한 집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이 실감되지 않는 낯선 얼굴이었다.
나와 세 살 터울이 지는 아내는 올해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결혼 전에는 함께 거리를 걷기가 부끄러울 만큼 어려 보였던-화장을 하진 않은 날에는 여고생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었다-아내의 얼굴에는 천진한 이목구비에 어울리지 않는 피로의 흔적이 역력했다. 이제 어디에 가도 여고생이나 여대생이라는 오해를 받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보다 늙게 보는 사람도 있을 듯했다. 붉은 물이 오르기 시작한 풋사과 같던 아내의 뺨은 주먹으로 꾹 누른 것처럼 깊이 패었다. 연한 고구마순처럼 낭창낭창하던 허리, 보기 좋게 유연한 곡선을 그리던 배는 안쓰러워 보일 만큼 깡말라 있었다.
마지막으로 밝은 곳에서 아내의 알몸을 본 것이 언제였던가 하고 나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올해가 아닌 것은 분명했으며, 지난해였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식구의 몸에 저만큼 깊은 멍이 든 것을 모르고 지냈을까. 동그랗게 올려 뜨고 있는 아내의 눈 옆에 가늘게 패인 주름들의 수효를 헤아려보다가, 나는 아내에게 옷을 모두 벗어보라고 말했다. 살이 빠진 탓에 흉하게 두드러져 보이는 광대뼈 언저리를 붉히며 아내는 항의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맞은편 아파트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다른 집들과 달리 이 집의 베란다는 동부간선도로에 연하고 있었다. 간선도로와 중랑천 너머 가장 가까운 아파트 단지까지의 거리가 세 블록이니 성능 좋은 망원경이 아니고서야 이쪽을 훔쳐볼 수 없을 테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안에서 십삼층 아파트의 거실을 들여다볼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라는 아내의 항의는 나에 대한 부끄러움 말고는 별 뜻이 없는 것이었다. 신혼 무렵의 휴일이면 다름아닌 이 거실에서, 팔월의 무더위를 견디느라고 베란다의 안쪽 유리문과 바깥쪽 창문까지 죄다 열어젖힌 채 한낮에도 몇차례씩 서투른 사랑을 나누다가 녹초가 되곤 하지 않았던가.
일 년쯤 지나자 우리는 더 이상 사랑에 서투르지 않게 되었으나, 녹초가 되도록 사랑하는 일에도 차츰 열중하지 않게 되었다. 아내는 초저녁 잠이 유난스럽게 깊었다. 내 귀가가 늦으면 어김없이 먼저 잠들어 있곤 했다. 혼자서 열쇠로 현관문을 따고 들어와 손발을 씻고 불꺼진 안방으로 들어가면, 잠들어 있는 아내의 고른 숨소리가 까닭 없이 적막했다. 그 외로운 마음을 달래보려고 아내를 안으면, 잠에 흠뻑 취한 눈을 반쯤 뜬 아내는 거부하지도, 그렇다고 뜨겁게 되안아주지도 않은 채 내 몸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잠자코 내 머리털을 쓸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전부 다? 다 벗으라구?"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다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아내는 벗은 속읏을 둘둘 공처럼 말아쥐고는 그것으로 음부를 가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밝은 곳에서 보는 아내의 알몸이었다.
그러나 나는 욕망을 느낄 수 없었다. 둔부뿐 아니라 옆구리며 정강이, 흰 허벅지의 안쪽 살에까지 연두색 피멍이 든 꼴을 보니 와락 화가 치밀었고, 화가 가시자 까닭 모를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방심하기 쉬운 성격의 이 여자는 또 어느 저녁 거리에선가 초저녁잠에 취한 얼굴로 걸어가다가 서행하는 차에 부딪혔거나, 불 꺼진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져 놓고는 잠결에 그 기억마저 잃어버린 것이나 아닐지.
쏟아져 들어오는 늦봄 햇살을 등에 지고 두 손으로 음부를 가린채 오두마니 서서는 <병원에 가볼까?> 하고 다시 한 번 자문을 구하는 아내의 모습이 그지없이 한심하고 가엾고 서글퍼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애틋한 마음이 되어 아내의 깡마른 몸을 꼭 한 번 끌어안아 주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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